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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숲속 잡목같은 민초들의 삶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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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작가 이문구(59)씨는 충청도 보령 양반이다. 집안은 양반가문이지만 막노동과 농사일을 하며 자랐다. 그래서 그의 글은 능청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하며 씹을수록 감칠맛이 난다.

"지가 입었으면 잠자리 날갠디 내가 입어서 풍뎅이 날개란 얘긴가."

"사람이 암만 무던허다 해두 한 몸에 두 지게 지는 벱이 없는디."

이씨가 새로 내놓은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펼치자마자 쏟아지는 대화들이 한결같이 곱씹게 한다. 이번 작품집은 그간 나무이름을 제목으로 써온 8편의 단편을 묶어 7년만에 내놓은 것이다.

모두 나무지만 나무 같지 않은 나무들이다. 찔레나무.화살나무.소태나무.개암나무.싸리나무 등등.

"낙엽송이나 황장목처럼 근사한 기둥이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숲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될 풀같은 잡목들이죠.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나무들입니다."

소설은 이런 잡목같은 사람들 얘기다.

〈장평리 찔레나무〉는 시골마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늙은 농사꾼 부부가 주인공이다.

작가는 10년전 고향인 보령시 변두리에 농가를 개조한 작업실을 만들어 짬짬이 내려가 농사일과 글쓰기를 번갈아하고 있다.

시골 구석에서 만난 보통사람, 최근 IMF와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살기가 더 힘들어진 충청도 촌사람들과 어울려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얘기를 쓰게된 셈이다.

〈장석리 화살나무〉는 그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묻어있는 작품이다.

홍쾌식이란 주인공은 6.25 전쟁의 와중에 좌익쪽에 몸담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실존인물이다. 홍씨를 숨겨두고 의뭉스럽게 수사관을 따돌리는 아낙의 진득한 사투리는 겉으로 헐렁해 보여도 속으로는 야무지기 이를 데 없는 억척스러움이 묻어 난다.

야밤을 틈타 갯벌과 갈대숲을 헤치고 무인도로 숨어드는 주인공의 땀냄새와 긴장감이 다른 한 흐름을 이룬다.

소설의 배경이 된 전쟁 당시 작가의 아버지와 두 형은 좌익활동에 가담했다가 생목숨을 잃었다. 손에 땀을 쥐는 주인공의 야반도주는 작가의 기억에 남아있는 살풍경이 깔려 있는 셈이다.

"외국에서는 만년작(晩年作)이라는 말이 있어요. 늙어서 명작을 남긴다는 얘긴데, 우리나라에선 작가들이 단명해 그런 말조차 없지요. 모자라더라도 만년작을 한번 써보고 싶네요."

환갑을 앞두고 있는 이씨는 〈관촌수필〉이후 써온 잡목들의 세상살이 얘기 대신 앞으로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쓰고 싶어 했다.

자신이 겪은 전쟁의 비극은 이문열의 〈영웅시대〉같은 작품으로 나왔고, 6년간 막노동한 경험은 황석영의 〈객지〉같은 작품으로 나왔기에 새로운 얘기를 쓰고싶다는 것이다.

시인 신경림씨로부터 밤새도록 설득당한 끝에 물려받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이라는 감투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당분간은 쓰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 나서길 싫어하는 그로서는 성격에 맞지도 않아 시간은 물론 마음의 여유도 통 안생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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