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경제정책-종과 횡의 충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1%와 99%. 낯설지 않은 구호다. 과거 전제귀족정치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으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로 변환을 가져왔던 혁명의 시기에도 비슷한 구호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 구호가 지금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중심국들 거리에서 다시 외쳐지고 있다.

 서구 사회는 지난 수세기 동안 많은 내부적 갈등을 겪으며 경제사회 체제의 변화를 시도해 왔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지주와 농민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로의 계급 변화가 일어났고, 빈부 격차 확대와 도시빈민 문제가 야기됨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 사회주의 정부가 유럽을 휩쓸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세계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로 양분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정부 규모는 약 4배로 커졌으며 각종 복지제도, 노동법, 공정거래법 등이 도입됐다. 오늘날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정부 지출은 총국민소득의 40%를 넘고 있다.

 세계화의 진행과 아시아 국가들의 부상은 서구에서 이러한 추세를 바꿔 놓았다. 자본과 인력의 흐름에 있어 국경이 무너짐에 따라 자국 경제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낮추고 기업 부담을 가볍게 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게 됐으며 그 결과 세수가 줄다 보니 복지 지출도 줄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나 한번 복지 혜택에 젖은 국민들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서구가 당면한 재정위기, 정치적 갈등의 근본적 이유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온 소득 격차 심화와 금융위기는 이러한 정치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서구에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우리 국민 스스로 토론과 새로운 제도의 정립을 통해 내부적 갈등을 여과하기 전에 또 다른 환경의 격류에 휘말려오곤 했던 것이다. 세계경제사에 있어 우리와 같이 산업화·민주화·세계화를 거의 동시대에 맞물려 경험하고 있는 사회는 없었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가 소화해야 할 갈등의 소재가 크고 많으며 가치의 혼돈이 심할 수밖에 없다.

 압축적 성장의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국내의 발전단계적 측면에서 요구되는 정책 방향과 세계화에 따른 국제환경적 측면에서 요구되는 정책 방향이 다른 나라들에서보다 더 심하게 충돌하고 있다. 필자는 2009년 저서 『한국의 권력구조와 경제정책』에서 이를 ‘종(縱)과 횡(橫)의 충돌’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종적인 문제는 빠른 경제성장과 소득수준의 향상에 따라 새로이 분출하게 된 국민들의 욕구를 수용해야 하는 국내적 도전을 말하고 횡적인 문제는 현재 한국경제가 놓여 있는 국경 없는 경쟁이라는 세계경제 환경 속에서 당면하게 되는 외부적 도전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도전은 각기 다른 정책 방향을 요구하며 서로 충돌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한국 경제정책이 처하고 있는 딜레마다. 종적인 측면에서는 과거 서구 사회가 그랬듯이 복지 강화와 큰 정부가, 횡적인 측면에서는 최근의 서구가 추구해온 바와 같은 감세(減稅)와 작은 정부가 충돌하고 있다. 종적인 측면에서는 정책의 공정성이 요구되고 횡적인 측면에서는 정책의 효율성이 요구된다. 이러한 충돌은 오늘날 경제정책에 있어 진보와 보수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을 거치고 냉전시대의 최전선에서 북한과 대치하다 보니 그동안 진보적 관점과 요구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억제하려 한 측면이 있다. 걸핏하면 색깔론으로 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발전단계적 측면에서 볼 때 진보적 정책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를 수용해 나가야 한다. 우리만큼 먹고사는 나라에서 우리만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에 인색했던 나라도 없다. 그러나 서구가 간 복지국가의 길을 무작정 따라가려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이 돌아 나오려 하고 있는 그 길의 중간쯤 어디에서 만날 생각을 해야 한다.

 경제정책과 사회제도는 진화하는 것이다. 인류가 실험해온 그 어떤 체제도 완전한 것은 없었다. 헐벗고 굶주릴 때는 성장이 최고의 목표가 돼야 하지만 일정한 소득수준에 이르게 되면 성장만으로는 안정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종과 횡, 혹은 진보와 보수를 다 끌어안고 가는 길을 택해야 한다. FTA 등 개방과 경쟁의 확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 강화를 함께 추구해야 한다. 재정을 통한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고 공정경쟁 기반을 확립해 경제력 집중과 부에 의한 사회계급의 고착화를 억지해 나가야 한다.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설계할 것인가 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큰 과제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