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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32) 윤석화의 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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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신성일·윤석화(왼쪽) 주연의 멜로영화 ‘레테의 연가’(1987). 작가 이문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연극배우로 유명했던 윤석화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중앙포토]

1980년대에도 영화배우로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85년 대구에서 엄앵란의 식당 일을 거들고 있을 때였다. 책(시나리오) 한 권이 담긴 임권택 감독의 우편물을 받았다. 83년 시작된 KBS 이산가족 찾기를 다룬 영화 ‘길소뜸’이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로 시작하는 최무룡·신영균·엄앵란 주연의 ‘남과 북’(1965) 주제가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이산가족 찾기는 온 국민을 울음바다에 빠트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작품이었다. 탐이 났다. 임 감독에게 전화 하니 촬영까지 3개월 여유가 있다고 했다.

 6·25로 헤어진 연인 화영(김지미)을 찾아 30년 동안 전국을 떠도는 남자 동진 역이었다. 초췌한 외모여야 하는데 내 몸은 너무 건강했다. 할 일이 없던 터라 매일 아침 우리 식당 옆에 있는 체육관에서 운동했기 때문이다. 근육질로 다져진 84㎏짜리 몸이었다. 남은 시간 홀쭉한 몸 만들기에 돌입했다. 쌀·밀가루·설탕이 들어간 ‘삼백(三白) 음식’을 철저하게 삼갔다. 오로지 꽁보리밥, 야채쌈, 생선, 된장찌개로 식단을 차렸다. 촬영 직전 몸무게를 67㎏까지 맞춰놓았다. 임 감독은 무게감 있는 감독으로 거듭났다

 87년 이문열 원작의 영화 ‘레테의 연가’는 윤석화의 데뷔작으로 기억할 만하다. 하지만 연극 ‘신의 아그네스’로 유명한 윤석화는 교수와 제자의 사랑을 그린 이 작품에서 장길수 감독과 대판 싸우고 영화계를 떠났다. 사연은 이랬다. 나와 윤석화의 크랭크인 장면 촬영이 강원도 용평에서 진행됐다. 차를 타고 온 윤석화가 사색이 돼 있었다. 어렵게 촬영 끝내고 서울 돌아가는 길에 윤석화는 장 감독의 행동에 분통을 터트렸다.

 “무슨 저런 감독이 있어요? 다짜고짜 우리 집에 들어와 의상을 몽땅 봉고차에 실어버렸어요. 영화는 이렇게 찍는 건가요?”

 윤석화와 장 감독 사이에 금이 간 사건이었다. 나는 촬영장에서 윤석화의 언니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배웠다. 이대 영문과 출신의 윤석화 언니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시장을 지낸 캘리포니아 캐멀시티의 명문가인 재퍼슨 패밀리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 가문으로 유명한 재퍼슨 패밀리는 상상 이상으로 전통을 중시했다. 이 동양인 며느리는 엄격한 교육을 받느라 3년 동안 외출을 전혀 못했다. 3년 간 고된 시집살이가 끝나자 시부모가 “고생 많이 했다”며 그 집안 열쇠 꾸러미를 한 뭉치 넘겨주었다 한다. 윤석화 언니는 동생 촬영 구경 차 잠시 귀국한 것이다.

 윤석화와 장 감독의 사이는 녹음실에서 더 벌어졌다. 나와 윤석화의 목소리 톤이 교수와 제자로는 맞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장 감독은 성우 손도심을 불러 윤석화 목소리를 대체하도록 했다. 상처 받은 윤석화는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나 역시 장 감독이 마땅치 않았다. 88년 ‘아메리카 아메리카 아메리카’ 미국 캘리포니아 사막 로케이션에서 장 감독과 다시 만났다. 그는 배우들을 오픈카에 태워 놓고 사막의 뜨거운 햇볕 아래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도록 했다.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나는 장 감독의 따귀를 때리고 말았다. 장 감독은 사과하지 않으면 촬영 못한다고 버텼다. 대단히 난감했다. 내가 사과하면서 촬영이 겨우 재개됐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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