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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신뢰 위기에 빠진 두 명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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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남중
논설위원

2001년 1월 KAIST ‘총장 추천위원회’ 위원 경종민 교수는 설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급히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30여 년간 재직하며 혁신을 선도한 인물을 총장으로 모셔 오기 위한 출장이었다. 바로 서남표 기계공학과 교수였다. KAIST가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려면 서 교수가 꼭 필요하다는 게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흘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금 하는 일에 진력하겠다”는 서 교수의 한마디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서 교수는 5년이 지난 2006년에야 KAIST 총장으로 온다. 경 교수가 반겼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시 5년여가 흐른 지금 경 교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서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선봉에 서 있다. 서 총장에 대한 존경과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것이다. 26일 이사회를 앞두고 그는 교수협의회장 자격으로 이사 전원에게 ‘서남표 총장의 사퇴 이유’를 담은 e-메일과 등기우편을 보냈다. 구성원들과 소통하지 않는 독선적인 대학 운영과 과도한 특허 소유를 통한 사익(私益) 추구 등이 골자다. 요컨대 “서 총장은 이제 거의 모든 교수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서 총장은 한국 대학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 개혁의 상징으로 통하는 이유다. 그런 서 총장이 신뢰 위기에 몰린 건 안타까운 일이다. 더 심각한 건 지난 4월 학생 자살사태를 계기로 구성된 혁신비상위원회가 내놓은 26개 의결 사항을 서 총장이 모두 수용키로 했음에도 불신의 골은 더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교수·학생이 모두 교수협의회와 뜻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다. KAIST엔 세 종류의 교수가 있다는 자조(自嘲)가 나돈다. 총장에게 잘 보인 교수, 잘 보이려고 애쓰는 교수, 잘 못 보인 교수가 그것이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교수협의회의 행동을 학내 주도권 쟁탈전이라며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이 와중에 이사회는 그제 회의에서 “총장의 지속적인 개혁 추진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대학 구성원 사이가 그야말로 사분오열(四分五裂)하는 양상이다. 서 총장으로선 3년 가까이 남은 임기를 마저 채우는 것과 용퇴하는 것을 놓고 이래저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눈길을 서울대로 돌려 보자. 서울대는 지금 ‘법인화’를 둘러싸고 학내 구성원이 갈라져 있는 형국이다. 26일 정관 초안 등에 대한 의견 수렴을 위해 마련된 ‘법인화 준비 공청회’가 또다시 파행을 빚었다. 법인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단상 점거로 17일과 20일 열려던 1, 2차 공청회가 무산된 데 이어서다.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노조 소속 교수·직원들도 법인화 재논의를 주장하며 학생들을 거들고 있다. 1987년 서울대 장기 발전계획을 통해 법인화 필요성이 제기된 이후 20여 년의 오랜 논의 끝에 지난해 말 ‘서울대 법인화법’까지 국회를 통과한 마당이다. 그런데도 이 모양인 건 한마디로 학교 당국과 구성원 간 신뢰 부재 탓이다.

 『트러스트』를 쓴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국가·사회를 움직이고 발전시키는 힘은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에서 나온다”고 했다. 대학 사회라고 다를 리 없다. 대학 구성원들이 서로 믿고 존중하며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만드는 신뢰야말로 대학 발전의 동력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 명문대인 KAIST와 서울대가 신뢰 위기에 빠진 게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과학기술 교육의 메카’로 불리는 KAIST요,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고 시인 정희성이 칭송한 서울대가 아닌가. 마땅히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닌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신뢰 위기에 발목이 잡혀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그러기엔 갈 길이 멀고, 시간은 촉박하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