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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갔던 중소기업들 … 또 몰래 밤에 짐 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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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동안 뜸했던 중국 진출 국내 기업의 무단철수가 다시 생기고 있다. 중국 최대 경제도시인 상하이에서다. 원저우(溫州)발 ‘도산의 물결(倒閉潮)’이 한국 투자기업에까지 파급되고 있어 추가 사례도 우려된다. 업계는 2008년 칭다오(靑島)를 중심으로 일었던 무단철수 사태가 재연되지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하이 쑹장(松江)에 진출한 장갑 제조업체인 S사의 한국인 경영진은 지난 9월 초 무단철수를 감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개월째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되자 몸만 빠져나온 것이다. 직원들은 요즘도 쑹장구(區) 정부로 몰려가 밀린 급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상회 등이 나서 타협점을 찾고 있지만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사의 무단철수는 중국 진출 기업이 최근 직면한 경영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지난 7월 시행된 사회보험법이 직격탄이었다. 내지인(상하이 거주자)뿐만 아니라 외지인(농민공) 종업원도 5대 사회보험(양로·실업·의료·재해·출산)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게 이 법의 핵심이다. S사는 그동안 직원(125명)의 90%에 달하는 외지인에게 ‘종합보험’ 하나만을 들어 줬다. 급여의 약 12% 수준이다. 그러나 사회보험법 시행으로 5대 보험 가입이 의무화되면서 회사가 대신 내주는 보험료는 급여의 44%로 늘었다. 현지 한 기업인은 “올해 최저임금 인상분 14%를 감안하면 급여에서만 40~50%의 인상 요인이 발생했다”며 “임가공업체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회사 경영을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수출 부진이다. 올 하반기 들어 미국과 유럽으로부터의 수입 오더가 줄어들고, 수출대금 회수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위안화 평가절상으로 매출액의 약 3~5%를 환차손으로 ‘반납’해야 했다. 은행 창구는 막힌 지 오래다. 이 회사는 그동안 본사 보증으로 한국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왔으나 중국의 긴축정책으로 그마저 끊겼다. 원저우에서 시작된 ‘돈 가뭄(錢荒)’ 현상이 S사를 덮친 것이다. 최원탁 법무법인 대륙 상하이대표는 “올해 말 시행될 예대비율 75% 규정을 맞추기 위해 각 은행이 오히려 대출을 회수하는 실정”이라며 “외국 중소투자업체가 금융권에서 돈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원가 부담, 수출 부진, 금융경색 등이 S사를 무단철수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몰고간 것이다.

 중소 제조업체가 몰려 있는 칭다오 등 산둥 지역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지 교민들은 ‘제조업 분야 중소기업 10개 중 7~8개는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 보고 있다. 도산기업이 늘자 칭다오 해관(관세청) 당국은 한국 기업의 원부자재 수입에 대해 제공했던 관세 우대조치를 일괄 폐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평복 KOTRA 칭다오무역관 고문은 “2008년에는 부실·악덕기업이 시장에서 퇴출하는 형태였다”며 “지금은 견실한 기업도 원가를 맞추지 못해 도산하는 구조적 위기”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한국 기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박한진 KOTRA 베이징무역관 부관장은 “중국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민영기업·외국투자기업 모두 한계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며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상하이=한우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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