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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판 ‘분노의 포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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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경철
시골의사

정신과 의사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률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정신과 진료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문화적 특성상 진료가 필요함에도 병원을 찾지 않는 사람들의 숫자를 감안할 경우 실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수는 공식통계보다 최소 두 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사회문화적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우울증이 높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우울증의 주요인 중 하나가 사회적 고립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거미줄처럼 구축돼 있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사회적 고립의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우리는 향우회·동호회·동기회·동창회·화수회부터 부녀회·노인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인연을 매개로 거미줄 같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고, 어지간한 사람들은 이런 모임으로 인해 사생활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대인관계가 활발한 나라다. 그 때문에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나 과거 공산권처럼 폐쇄적인 사회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가장 많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에 대해 ‘과도한 경쟁사회’가 그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중·고등학교부터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에 내몰리기 시작하고, 이후에는 취업전쟁, 취업 후에는 승진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경쟁의 바다’에 내몰려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의 경쟁상대라는 잠재적 학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런 치열한 경쟁사회에서는 아무도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게 된다. 서로가 경쟁자란 인식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드러낸다는 것은 곧 나의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친구나 동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항상 경계해야 하는 잠재적 경쟁자로 살아가는 분열적인 문화는 모두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또 이런 고립이 지속되면 그것은 결국 부정적인 문화로 굳어져 나중에는 부부간이나 심지어 부모·자식조차 진심을 숨기고 고통을 감추는 상황을 만들게 되고, 그 결과 자기 스스로를 절해고도의 섬에 유폐시키게 되는 것이다. 경쟁을 당연시하는 문화가 가져다준 부정적 유산인 셈이다.

 굳이 우울증이 아니더라도 이런 경쟁상황이 지속되면 국가사회의 건강성을 해치게 된다. 사회 속의 개인이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등을 돌리게 되면 사회가 각박해지고 점점 더 거칠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인터넷 공간을 들여다보면 타인을 향해 던지는 증오의 도끼가 신랄하다 못해 악랄한 경우가 많고, 온갖 가공의 루머와 음해들로 얼룩져 있다. 거기에 지금처럼 선거나 정치의 계절이라도 닥치게 되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의 상황까지 펼쳐진다.

 결국 해법은 결과중심주의에서 비롯된 경쟁사회를 과정중심적 사회로 전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아래에서부터의 변화로 이루기는 불가능하다.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수단이 좋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압도적 내신을 쌓아야 가능한 환경에서 선행학습을 포기하고 전인교육을 선택할 수 있는 부모가 나올 수 없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스펙을 쌓아야 대기업에 입사하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구조 속에서 스펙 경쟁을 포기하는 대학생이 나올 리 없다.

 마찬가지로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기업의 목표가 바뀌지 않는 한 다양한 사회적 인재를 기업이 고용할 리가 없고,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효율성이 높은 수출대기업을 집중 지원하고, 시장 독점과 과점을 방치하는 상황에서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에 자신의 미래를 의탁할 청년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국가→기업→대학→가정의 순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국가의 성과를 재는 기준을 국내총생산(GDP) 대신 국민의 행복도를 반영할 수 있는 지표로 바꾸고, 기업에 대한 감세나 세액공제 등의 지원은 투자나 고용의 기여도에 따라 평가되고 달라져야 한다. 이렇게 고용기회를 만드는 상층부의 변화가 시작되어야만 교육현장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경쟁이 완화되고 성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문제를 도외시하고 지금과 같은 살벌한 경쟁체제, 승자독식의 사회를 계속 이어간다면 우울증과 자살률 세계 1위를 넘어 대중의 거대한 체념과 분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1등이 아니어도 기회가 있다는 꿈과 희망, 그리고 위로와 격려 바로 그것이다.

박경철 시골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