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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번째 편지 〈일본 기행(1)-풍경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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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 돌아와 짐을 풀 겨를도 없이 일본으로 떠나왔습니다. 아오모리(靑森), 푸른 숲, 온천과 스키와 사과와 유리 칠기 공예와 너도 밤나무의 고장. 배를 타면 곧바로 북해도로 갈 수 있는 곳. 일본 동북부에 위치한 이 산간 지방은 겨울이 되면 십 미터나 눈(雪)이 쌓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들 문패를 현관에 달아 놓았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을 읽고 나서 오래 전부터 일본에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늦게서야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아오모리행 비행기를 타게 됐습니다. 프랑스의 비평가 모리스 브랑쇼는 '일본에 가서 죽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적 기호와 상징이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아마 그런 말을 했는지 모릅니다.

한반도의 함흥과 경도가 같은 아오모리는 6월인데도 아직 선선하고 밤엔 한기가 느껴집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산 위에 아직도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눈은 8월까지 간다고 합니다. 거의 일 년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핫코다산(八甲田山)엔 아직도 스키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짐을 풀고 호텔 밖으로 나가 저녁을 먹습니다. 아오모리산 정종(사케)을 먹는데 안주로 나온 종지에 백어(白魚)라고 하는 물고기들이 스물여 마리 꿈틀거립니다. 크기는 작은 멸치만한데 빙어처럼 속이 투명하고 눈알만 점처럼 까맣습니다. 여기에 간장과 계란 노른자와 와사비를 풀어넣고 마십니다. 목구멍부터 속이 간질간질합니다.

정종은 양조장 주인이 직접 가져온 것인데 아주 맛이 좋습니다. 일식집에 가면 나는 월계관이란 정종을 자주 마셨습니다. 알고보니 이곳에서는 진로소주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아오모리 정종이 월계관보다는 맛이 깊은 듯합니다. 막걸리도 있습니다. 우리 것보다는 좀 맑은 느낌입니다.

다음 날 오끼나와산 소주도 마셔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정갈한 맛이 납니다. 우리 것에 비해 지나치게 걸러낸 느낌입니다. 취향에 관계된 것일 텐데 소주는 우리 것(참이슬이나 곰바우)이 좋고 막걸리는 아오모리 산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정종은 원래 일본 술이므로 비할 데가 없지만 아무튼 월계관보다는 아오모리산 정종이 깊고 그윽합니다.

이왕에 음식 얘기가 나왔으므로 회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쪽은 가리비라는 조개가 많이 나오는 지방인데 어느 음식점을 가나 한결같이 구워서 줍니다. 사실 나는 회로 먹는 것을 좋아해서 지난 번 강릉 속초에 갔을 때도 몇 개나 생으로 먹었습니다.

다음 날은 광어회를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비쌉니다. 하지만 회 뜨는 솜씨만큼은 지금껏 내가 보아온 중에 가장 으뜸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회뜨는 일 자체가 요리에 속하는 것이어서 그냥 생선으로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비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월계수 잎에 올려놓은 회를 먹는 동안 몸통에 뼈만 남은 광어는 내내 퍼득이고 진저리를 치는 것이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술잔을 자꾸 멈추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계속되는 떨림을 훔쳐보며 내내 술을 마시다 마지막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올리자 마침내 움직임이 조용히 멎습니다.

이들에게도 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에서 먹는 물김치처럼 소금에만 절여 잘게 썰어놓은 것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국화 김치입니다. 노란 국화잎을 절여 조몰조몰 손가락으로 쥐여 꽃무늬가 있는 접시 위에 살짝 올려놓습니다. 파란 잎 하나와 함께.

이튿날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지를 구경하고 도와다(十和田) 호수로 갑니다. 이곳에 가려면 여덟 개의 투구 모양으로 이어져 있다는 핫코다산을 지나가야 합니다.

또 국립공원인 시라가미산지(白神産地)의 너도밤나무 원생림을 지나가야 하는데 이곳엔 유명한 오이라세(奧入瀨) 계곡이 있습니다. 하얀 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포, 흰 머리의 폭포, 그밖에도 여러 개의 폭포가 있는 이 계류는 장장 14km가 마주치며 흘러 마침내 도와다 호수에 이릅니다.

호수 한가운데엔 분경(盆景) 같은 작은 섬들이 드문드문 떠 있고 멀리 눈덮인 산들이 호수를 깨금발로 흐리게 넘겨다보고 있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한 시간 동안 돕니다. 호수엔 구름이 끼고 바람이 불어 변화가 무쌍합니다.

물안개 속에서 분경들이 스스스스 움직이며 구경꾼의 눈길을 피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듯이 말입니다. 호수엔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한 아름다움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일본인의 미의식은 아마도 풍경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깊고 그윽한 풍경에 압도되어 복종의 백성이 되지 않았나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 언어엔 욕이 없다고 합니다. 욕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대개는 은유적으로 의사 표시를 합니다. 직접적인 표현은 가능한 삼갑니다. 무엇이든 조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풍경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돌아올 때까지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히로사키(弘前) 네푸타 축제 준비 현장을 보고 일본에서도 5월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히로사키성으로 갑니다. 이 성은 쯔가루(津輕) 지방 영주의 거성으로 1611년 세워졌다가 화재로 소실되어 1810년 재건된 것입니다. 8월의 네푸타 축제와 5월의 벚꽃 축제엔 약 사백 만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드는데 벚꽃 축제엔 이들이 인생관과 사생관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사양〉과 〈인간실격〉을 쓴 쯔가루 지방의 다자이 오사무 생가에 들렀다 버스를 타고 농촌 풍경을 내다보며 아오모리 시로 돌아옵니다. 금세 밤이 내립니다. 춥습니다.

〈강이 좋다〉란 이름의 장어집에서 저녁을 먹습니다. 6월이기 때문에 볼 수 없는 히로사키성의 5월 등롱 축제와 8월의 네푸타 축제를 상상합니다. 아름다움과 허무 속에서 유전된 그들의 사생관을 생각합니다. 어제오늘 보고온 핫코다산과 오이라세 계류를 떠올립니다. 그곳을 지나다 본 눈밭을 뛰어 달아나던 사슴을 떠올립니다. 사양(斜陽)에 죽어간 다자이 오사무를 생각합니다.

미(美)와 죽음. 내가 어제오늘 본 것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모리스 블랑쇼도 그런 뜻에서 아마 일본에 와서 죽고 싶다고 했을 겁니다. 삼십 년 전에 죽은 아오모리 출신의 어떤 시인은 먼저 간 아내를 떠올리며 이런 구절을 남겼다고 합니다.

"꽃이 많이 피는 계절에 나무 아래서 죽고 싶다."

늦은 밤에 당신께 전화를 겁니다. 취한 귀에 목소리가 아득히 멉니다. 아오모리. 이 밤이 지나면 떠나야 할 곳입니다. 4박5일. 아직도 천황이 군림하고 있고 더이상 숙제가 없어 권태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 사회엔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권태 때문에 오음교 사건이나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한다는 어느 젊은 작가의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오모리는 그들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미와 죽음을 내게 일깨워준 곳이었습니다. 내처 북해도의 눈을 보러 가고 싶지만 내일이면 그만 떠나야 하겠습니다.

돌아가 속히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일본 인형 몇 개를 사서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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