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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참 이상한 서울시장 선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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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서울시장 선거가 눈 터지는 계가(計家)바둑이 됐다. 정두언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은 현재 판세를 “박원순 후보의 하락이지, 나경원 후보의 상승이라 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박 후보의 신비적 이미지가 검증과정에서 깨졌기 때문이다. 예상과 달리 입양과 병역, ‘협찬 인생’, 낙천·낙선운동은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 조짐이다. 오히려 훨씬 휘발성이 강한 대목은 학력 문제다. 특히 디자인학부의 박 후보 딸이 서울법대로 전과한 것이 20~30대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대학 시절 누구든 전과·편입을 고민해본 젊은이들이 이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동층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번 선거는 전통적인 구도와 사뭇 다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선 여야 의원들부터 시큰둥한 분위기다. 죽자살자 뛰기보다 겉으로 지원 시늉만 내는 경우가 태반이다. 선거 결과가 내년 4월 총선 때 자신들의 정치적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나 후보가 이기면 당 개혁이 물 건너갈지 모른다”고 경계했다. ‘지금 이대로’의 안일한 인식이 총선 패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나 후보가 승리하면 열심히 돕는 박근혜 전 대표보다 한때 ‘탤런트 정치인’이라 구박하던 홍준표 대표가 더 신나 할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민주당 의원들도 소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사석에서 “박 후보의 당선은 재앙”이란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야권통합 과정에서 민주당 지분은 줄고, 최악의 경우 현역 의원들의 공천 학살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학규 대표와 박영선 의원을 빼면 박 후보 주변에는 친노세력과 사회단체 출신 일색이다. 문재인·한명숙·이해찬·유시민 등 ‘무지개연합군’이 박 후보와 손잡고 민주당 본류를 압박할 수 있다는 경계감을 숨기지 않는다. 민주당 의원들이 지원사격에 시들한 이유다.

 그나마 고질적인 지역 대결 구도가 완화되는 조짐은 다행이다. 박 후보가 무소속으로 나오면서 강남의 압도적인 한나라당 지지 현상은 누그러졌다. 강북의 민주당 우세도 엷어졌다. 호남 출신 유권자들의 응집력은 약해지고 있다. 박 후보의 검증에서 ‘경남 창녕’이란 지명이 너무 자주 등장한 역풍을 맞은 것이다. 호남 출신 비중이 높은 서울 서남권에서 나 후보가 박 후보의 지지율을 추월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여야 대결 구도가 사이버 대(對) 오프라인의 새로운 진영싸움으로 흐르는 대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은 “우리도 70만 명의 팔로어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트워터는 이미 박 후보의 세상이다. 그의 멘토단인 이외수·조국·공지영씨 등은 국내 1~10위의 파워 트위터다. 이씨 혼자의 팔로어만 해도 90만 명이 넘는다. 사이버 세상에서 손가락의 힘은 무섭다. 야권후보 단일화 때 민주당도 당조직을 최대한 동원했지만 손가락 파워에 무너졌다. 분당 보선에서 스스로의 힘을 깨달은 20~30대들은 “누구든 혼낼 수 있다”며 손가락 동원에 재미를 붙였다. 반면 오프라인 입소문을 중심으로 한 50~60대의 신중한 표심은 흔들릴 기미가 없다.

 이번 선거에서 더 이상 정책·인물 대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수와 진보, 사이버와 오프라인, 세대 간의 세(勢)대결로 치닫는 양상이다. 양쪽 지지층은 이미 뭉칠 대로 뭉치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묻지마 투표’나 ‘보팅 어게인스트(Voting Against·싫어하는 쪽을 떨어뜨리기 위한 투표)’ 현상이 재현될 수밖에 없다. 계가 바둑은 끝내기가 승부처다. 맨 마지막에 공배를 메워야 하는 쪽이 반집을 진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알리기보다 상대방의 실수를 기다리는 살얼음판이 이어질 게 분명하다. 사회는 진화해도 선거는 자꾸 퇴화하는 느낌이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