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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받는 ‘황금 십자가’ … 자산 저수익 시대 예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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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미국 뉴욕 맨하튼 월스트리트에 있는 황소상은 금융자본의 강건함을 상징한다. 최근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로 공격받고 있는 금융자본을 쓰러진 황소상에 비유해 포토그래픽 처리했다.

8월 이후 글로벌 자산시장의 추락에 투자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은 다름아닌 정치 변수 때문이었다. 그리스에 대한 유로존의 구제금융과 미국 정부의 부채상한 설정 등의 문제가 각국 정상과 의회 등의 파워게임에 따라 춤을 췄다.

경제와 시장 논리로는 해석이 안 되고 전망도 힘든 일들이 잇따라 튀어나왔다. 급기야 금융자본의 탐욕을 성토하는 시위가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상황이다. 정치인들은 거리의 성난 군중의 목소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게 다 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적인 변수들을 제대로 읽어야 재테크에도 성공하는 세상이다.

대공황 직후인 1930년대와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1980년대에 버금가는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일대 변화가 현재 진행 중이란 진단도 나온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지혜를 얻기 위해 역사 여행을 떠나보자.

‘황금의 십자가(Cross of Gold)’. 윌리엄 브라이언 제닝스가 1896년 7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월스트리트를 공격하면서 쓴 표현이다. 황금의 십자가는 금융 권력을 상징했다. 그는 “인류가 황금의 십자가에 매달리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월스트리트의 횡포에 맞서자는 외침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의 말에 뜨겁게 반응했다.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로 계층간 갈등이 고조됐다. 금융인들은 테러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 후 115년이 흘렀다. 2011년 10월 월스트리트는 또 다른 공격을 받고 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부자 1% 대 빈자 99%인 사회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스마트폰이란 21세기 장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증폭시켰다. 시위가 뉴욕 맨해튼뿐 아니라 미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국경을 넘어 프랑스와 유럽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까지 거들고 나섰다. 최근 그는 “반 월스트리트 시위는 미국인들의 좌절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무슨 좌절일까. 제프리 가튼 예일대 교수는 블로그 글을 통해 “미국인들은 방종(버블)과 위기를 거치며 시장주의의 약속이 깨지는 것을 목격했다”며 “기존 경제 논리와 질서 속에선 자신의 꿈을 이루기 힘들다고 인식하게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역사에서 대중의 인식 전환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황금의 십자가’ 시대를 거치며 미국에선 독점기업(트러스트) 해체가 본격화됐다. 가튼 교수는 “JP모건 같은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가들이 창조해낸 수많은 거대 트러스트를 보면서 미국인들은 ‘우리가 믿었던 자유시장의 결과가 저런 것이었나’라며 자탄했고 결국 트러스트는 퇴조했다”고 말했다.

 1900년 이후 미국에선 진보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났다. 각 정당의 정책이 시장주의에서 규제 쪽으로 이동했다. 반독점법(셔먼법)의 엄정한 집행과 아울러 부자들을 겨냥한 누진 소득세가 도입됐다. 1912년 집권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소득세율을 최고 60~70%로 끌어올렸다. 징벌적 수준이었다.

 1929년 대공황은 변화를 촉진시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취임 연설에서 월스트리트를 ‘악덕 돈놀이꾼’으로 공격했다. 금융역사가 고든은 “브라이언이 말한 ‘황금의 십자가’가 루스벨트의 ‘악덕 돈놀이꾼’으로 되살아났다”며 “이후 월스트리트는 규제의 사슬에 묶였다”고 말했다.

 요즘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루스벨트 시대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받고 있을 법하다. 딕 보베 미 로스데일증권 은행 애널리스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월스트리트가 악한 사람들의 소굴로 비쳐지고 있다”며 “앞으로 기업인과 투자자들은 시장뿐만 아니라 정치 리스크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정치 전문기자인 제럴드 사이브는 최근 칼럼에서 “미국 재계가 정치적으로 위험한 시대에 들어섰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까? 전문가들은 저성장·저수익의 시대를 예상한다. 규제 강화의 결과다. “경쟁이 억제되면서 더 이상 승자가 파이를 독식하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보베는 말했다. 워런 버핏이 주창하듯이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부담도 늘어날 것이다. 그만큼 주주들에게 돌아갈 파이는 줄어들 공산이 크다.

 금융회사는 더 촘촘한 규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양적 완화(QE)’ 개발자인 리하르트 베르너 영국 사우샘프턴대 교수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금융은 빠르게 공공화될 가능성이 크다”며 “거대 은행들이 자산투자보다 일반 기업대출에 더 많은 자금을 배분하게 돼 금융권 평균 순이익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저성장·저수익은 우리의 노후대책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다. 미 투자전문지인 스마트머니는 “현재 연기금은 연평균 7~8% 수익률을 전제하고 있다”며 “그 수익률은 저성장 시대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전망”이라고 전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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