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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19> 군산 구불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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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군산에 가야 한다. 전군가도 꽃비는 4월에 내리지만, 군산은 가을에 가야 제격이다. 가을 꽃게가 군산항에 가득해서, 금강 하구에 가창오리가 내려앉아서 가을 군산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니다. 군산 하면 어쩔 도리 없이 떠오르는 스산하고 허한 분위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이끌려 떠나는 여행은, 가을 군산을 작심할 때 적용되는 표현이다.

군산에 가면 우리의 구부러진 어제가 있다. 전국 방방곡곡이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벗겨낸 다음에도, 군산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 부끄러운 왜색을 지우지 않았다.

일제가 이 땅을 떠난 지 6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군산에 남은 그들의 흔적은 이제 우리네 자취의 일부가 되어 먼지 뽀얀 세월과 함께 남아있다. 하여 군산 구석구석을 후비고 다니는 ‘군산 구불길’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휘청거린 굴곡 많은 우리네 삶을 닮았다. 가을 들머리 군산 구불길을 걸었다.

글·사진=손민호 기자 '

1 경암동 철길 마을. 사진에서 철길 왼쪽 건물에 사람이 살고 오른쪽은 화장실이나 창고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풍경이다.
2 구 군산세관.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다.
3 군산항 풍경. 일제는 군산항을 통해 호남평야에서 난 쌀을 일본으로 연신 옮겼다.
4 한국 최초의 빵집 이성당. 오후 3시쯤 들어갔는데도 빵집 안은 복작거렸다.
5 군산구불길 1구간은 금강을 따라 걷는다.


# 군산 구불길 탄생기

그러니까 군산 구불길은 어느 말단 공무원의 깨달음에서 비롯하였다. 2008년 10월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은 한 여행작가의 강연이 있었다. 그 강연을 듣고 감동한 청중 중에 군산시청 관광진흥과 임현(39)씨도 있었다. 그는 군산 관광 진흥의 희망을 도보여행에서 발견했다. 화려한 해수욕장도 없고, 유서 깊은 온천도 없고, 웅장한 산세의 국립공원도 없는 군산에서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는 방법은 도보여행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마침 제주올레가 개장한 직후였다.

 그는 우선 군산을 알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군산 출신이지만 고향에 대하여 아는 건 많지 않았다. 그가 교과서로 잡은 책은 군산시청 학예연구사였던 김중규씨가 쓴 『군산 답사·여행의 길잡이』. 그는 이 책을 달달 외우며 군산의 옛 모습을 그렸다. 군산을 걷는 길은, 군산의 옛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냥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량으로 이동했는데 이내 차를 버렸다. 똑같은 길이어도 감흥이 달랐다. 그렇게 6개월 동안 군산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시청 직원 열의 아홉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래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2009년 7월 모두 68㎞에 달하는 군산 구불길 1∼4길이 개통됐다. 막상 길이 열리니까 시청 직원도 하나 둘 동참했다. 주말마다 직원들이 나와 걷기 행사를 진행했고 인터넷 카페가 개설됐다. 공무원이 걷기 시작하니까 시민도 덩달아 걷기 시작했다.

 현재 군산 구불길은 10개 노선 188㎞ 구간이 나 있다. 예산 지원도 나와 모두 1억6000만원이 구불길 조성사업에 투입됐다. 구불길 자원봉사자도 47명까지 늘었다. 주말을 앞두고 구불길을 걷겠다는 전화가 시청에 쇄도한다. 그러나 시청은 한꺼번에 버스 두 대 이상은 받지 않는다. 당장 개방했다가 외려 길을 망칠까 염려해서다.

 참, 그 공무원 임현씨. 길에 관하여는 명사가 됐다. (사)군산 구불길 이사이자, 8월 출범한 전국 트레일 네트워크 ‘한국 길 모임’의 사무국장이다. 하나 시청에서는 여전히 말단 공무원이다.

# 시간여행을 떠나다

군산 구불길은 금강 하구에서 시작해 군산 시내를 한 바퀴 돌아나와 새만금 방조제까지 이어진다. 이 중에서 핵심 구간이라면 단연 구불 6-1길이다. 구불 6-1길은 채만식(1902∼50)의 소설 『탁류』의 무대가 되는 군산항 주변 구시가지 골목을 헤집는 길로, 탁류길이라고도 불린다.

 구불 6-1길은 문화재청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한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군산항을 끼고 있거나 지척에 두고 있는 월명동·장미동·금광동·신흥동·해망동 일대 거리는 아직도 일본식 건물이 곳곳에 남아있다. 문화재청은 이 거리에 있는 일본식 건물을 근대문화재로 지정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일본식 거리를 걷는 구불길을 포함한 금강하구길을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했다.

 구불 6-1길을 걷다 보면 눈에 익은 건물이나 거리가 자주 나타난다. 그럴 수밖에. 이 후미진 거리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됐다. 파란 대문과 붉은 담장이 인상적인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 가옥·사진)은 영화 ‘타짜’와 ‘장군의 아들’에 나온 그 집이고, 키 작은 가로수가 늘어선 낡은 골목은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 그 골목이다.

 군산항에서 시내 쪽으로 걸음을 돌리면 구불 6길이다. 구불 6길에서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 경암동 철길 마을. 기찻길과 바투 붙어 있는 일렬의 판잣집이 아득하고 서글픈 풍경을 자아내는 마을이다. 허다한 영화와 CF가 예서 촬영됐다. 2.5㎞에 달하는 이 철길 마을이 더 아릿한 건, 이 기찻길 옆 판잣집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어서다. 주민들의 마뜩잖은 시선이 자꾸 걸려 오래 카메라를 들고 있지 못했다. 1944년 철길이 놓였고,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

 경암동 철길에서 나와 금강을 따라 걸으면 구불 1길과 만난다. 금강 제방을 따라 18.7㎞나 이어진 길이지만, 강바람 맞으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탐조 회랑을 지나 상류 쪽으로 걷다 보면 제방 위에 세운 정자가 나타난다. 이 정자 주변은 11월 하순∼12월 중순 해질 녘에 걷기를 권한다. 가창오리 수십만 마리가 바로 머리 위를 날아서 지나가는 장관이 펼쳐진다.

길 정보 군산 구불길 10개 노선 중에서 8∼10길은 아직 조성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군산 구시가지를 걷는 6-1길은 이정표가 없다.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군산시청이나 관광안내소에서 군산 관광 지도나 군산시 근대문화유산탐방 지도, 군산 구불길 지도를 얻어 다니면 된다. 굳이 어디를 먼저 가야 할 필요도 없고 모든 곳을 다 방문할 필요도 없다. 대신 꼭 가보라고 권하는 곳은 하나 있다. 빵집 이성당이다. 1945년 문을 연 국내 최초의 빵집이다. 국내 최초라는 권위와 자부심이 1200원짜리 단팥빵에서 듬뿍 묻어난다. 063-445-2772. 군산 구불길 중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구간은 구불 1길과 구불 6길 진포시비공원에서 째보선창까지 구간, 그리고 구불 6-1길 31.9㎞다. 군산 구불길 인터넷 카페(cafe.daum.net/gubulgil), 군산시청(tour.gunsan.go.kr) 관광진흥과 063-450-6598, 군산구불길 사무국 063-467-9879(구불친구).

이번 달 ‘그 길 속 그 이야기’에서 소개한 ‘군산 구불길’ 영상을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와 중앙일보 아이패드 전용 앱, 프로스펙스 홈페이지(www.prospecs.com)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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