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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안철수·박원순의 반정치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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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헌장 77’이라는 반체제 운동으로 ‘벨벳 혁명’을 지휘해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체제 붕괴의 단초를 열었다. 그 공로로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탁월한 극작가이기도 한 그는 지금도 ‘세계의 양심’으로 높이 추앙받는다. 하벨은 84년 5월 프랑스의 툴루즈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출국이 금지되어 학위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연설문만 보냈다. 연설문의 제목은 ‘정치와 양심’이었고 주제는 반(反)정치적 정치(Anti-politika politika)였다. 반정치는 하벨의 행동원리였고 벨벳 혁명 성공의 원동력이었다.

 하벨은 반정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반정치적 정치는 권력의 기술을 조작하는 정치가 아니고, 인간을 인공두뇌적으로 지배하는 정치가 아니고, 공리와 실천과 책략의 기술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고 지키고, 인생의 의미에 봉사하는 정치를 말한다. 실천도덕으로서의 정치, 진실에 봉사하는 정치다. 인간적 척도에 충실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정치다.” 하벨의 반정치는 인간미 넘치는 덕치(德治)다. 국민을 조종하는 정치공학이 아닌 정치, 표 계산이 빠르고 유권자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에 흐르는 책략이 아닌 정치다. 인간이 실종된 비인칭적, 비개인적 권력행사로서의 정치가 아닌 정치다.

 안철수-박원순 바람도 근본에서는 반정치와 궤를 같이한다. 그것은 한국의 현실정치가 자초한 바람이다. 오늘의 정치는 입으로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외치면서 사리(私利)와 당리(黨利)만 좇는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국가전략도 없이 선거에서 표가 되는 인기영합과 내 사람 내 식구 챙기기에만 탁월한 수단을 발휘한다. 대통령은 복잡하고 수상쩍은 산술로 퇴임 후에 살 집터를 아들 이름으로 사서 민심불감증을 드러내고 도덕성에 먹물을 뒤집어썼다.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를 주재하고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고 겨울올림픽 유치하느라 애를 썼지만 그런 화려한 외교 퍼포먼스가 물가와 공공요금 잡기, 높은 실업률 해소, 전·월셋값 안정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그들만의 잔치”로 비칠 뿐이다. 만만한 대기업 닦달해서 위의 돈이 아래로 흐르게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런 토양에 변증법적 필연으로 등장한 안철수와 박원순의 반정치에 충성심 강한 오른쪽의 보수와 왼쪽의 진보좌파를 제외한 중도층이 쏠리는 건 당연하다. 두 사람은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참신한 얼굴을 들고나왔다. 그래서 젊은 층의 지지가 높다. 10·26 서울시장 선거가 주목받는 것은 그것이 내년 대선의 전초전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박원순의 당락은 한국에서의 반정치 실험의 성패를 판정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지금 박원순이 반정치 지도자의 조건을 갖춘 사람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원조 반정치인 바츨라프 하벨은 도덕성의 가장 높은 고지에서 반체제 운동과 정치지도자의 생애를 일관했다. 그는 사회운동 한다고 대기업에서 거액의 헌금을 받지 않았다. 그는 부자 돈 받아서 가난한 사람 도와준 게 무엇이 나쁘냐는 궤변을 토할 일도 없었다. 기획입양으로 병역을 기피했다는 의심도 받지 않았다. 천안함 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북한을 자극한 결과 일어났다는 폭언으로 안보관을 의심받고 한반도·북한 문제의 본질에 대한 철저한, 어쩌면 의도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우행을 범하지도 않았다. 악법도 법이냐에 대한 입장에서 오락가락하지도 않았다. 긴 말 줄여서 박원순은 도덕성과 양식과 투명성에서 하벨에게는 족탈불급이다.

 지금 세계가 정치의 대안을 찾는 반정치 운동으로 들끓는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 실업과 빈곤과 상실감에 지친 젊은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월스트리트와 브뤼셀 시위다. 그 운동은 곧 한국에도 상륙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이요, 전통적인 기존정치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운동이어서 일시적인 바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련의 시장제한적, 복지지향적인 입법이 예상된다. 안철수와 박원순은 한국의 잠든 정치판에 경종을 울리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판은 옐로카드를 받고도 스스로를 개혁할 능력이 없다. 반정치로 정치를 청소할 때다. 그런데도 안철수 ‘도련님’은 상아탑과 벤처기업의 안전지대에서 권력에 무임승차할 기회만 노린다. 박원순은 인간적 자질에서 반정치 지도자의 자격이 달린다. 역사의 물줄기가 요동치면서 바뀌는데 한국에는 그걸 받아낼 그릇이 없어 안타깝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