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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23) 사생결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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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79년 영화배우협회장 선거에서 신성일(왼쪽)이 당시 협회장 장동휘(오른쪽)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신성일과 장동휘는 사적인 감정까지 얽혀 선거에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됐다. [중앙포토]

난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다. 단 한 번, 1979년 3월 영화배우협회장 선거 때 오금이 저렸다.

  78년 12월 내가 지원한 공화당의 박경원 전 내무부 장관이 용산·마포 중선거구에서 3선의 신민당 김원만 의원을 물리쳤다. 박 장관을 도운 배경이 하나 있었다. 나는 78년 초부터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2001년 사단법인 영화배우협회로 개칭) 위원장(이하 배우협회장) 선거에 도전하고 있었다. 박 장관은 국회의원이 되면 내가 배우협회장이 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배우협회장 선거에서 당시 협회장인 선배 장동휘와 맞붙어야 했다. 3년 임기의 배우협회장 자리는 60년대 초부터 김승호·신영균(연임)·박암(연임)·장동휘 순으로 넘어갔다. 나는 60년대 중·후반 신영균 재임 시절 부위원장을 맡았다. 선배들은 “신성일은 독한 놈”이라면서 내가 협회장이 되는 걸 막았다. 젊은 피가 끓는 내가 영화계의 개혁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내겐 배우협회장을 맡아 영화계를 대변해보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나와 장동휘는 공존할 수 없는 사이였다. 주먹 출신의 장동휘는 64년 여름 내가 충무로 주먹들에게 억울하게 쫓길 때 도리어 그들에게 사과하라고 내게 압력을 넣었다. 15년 가까이 서로 악감정이 쌓여있었다. 나로선 악극단 출신의 장동휘가 배우협회장을 맡는 게 마땅치 않았다. 최무룡·박암·신영균 같은 신극단과 신협극단 출신까지는 영화계 선배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악극계 출신은 정통성을 가진 영화배우가 아니다. 70년대 중반부터 이소룡을 계기로 국내에 무술영화 바람이 불었다. 장동휘는 1인당 30만원씩 받고 무술영화에 출연하려는 태권도 선수들도 배우협회 회원으로 대거 받아들였다. 그 돈은 선거 대결에 사용됐다.

  78년 초로 예정됐던 배우협회장 선거는 장동휘 때문에 계속 연기됐다. 충무로 대원호텔과 명보극장 맞은편에 선거 캠프를 차린 내게 타격을 주려는 의도였다. 장동휘는 충무로 주먹들의 비호를 받으며 판세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갔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내 진영에 오창구라는 주먹 출신의 쇼단장이 있었다. 선거가 임박한 어느 날 나는 우리 캠프에서 평소 형이라고 불렀던 오창구와 욕설을 퍼부으며 싸웠다. 그는 장동휘 캠프로 가서 내게 복수하겠다고 다짐했고, 곧바로 장동휘의 신임을 얻었다. 밤마다 공중전화로 장동휘 캠프의 정보를 속속들이 내게 보고하는 ‘첩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오창구였다. ‘지피기지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 구절을 떠올린 내 계획에 따라 거짓 투항한 것이다. 상대방의 자금줄을 차단해야만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오창구가 장동휘에게 선거자금이 들어간다는 첩보를 전해왔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300만원, 곽정환 합동영화사 사장이 200만원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나는 다음 날 아침 태흥영화사 건물로 이 사장이 출근하는 것을 확인하고 뒤따라 들어갔다. 아침부터 웬일이냐는 듯 보는 이 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장동휘씨에게 돈 주기로 했죠?” 그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돈 300만원 주기로 했죠? 나와 오래 보려면 알아서 하세요. 곽정환 사장에게도 전화해줘요.” 정곡을 찔린 이 사장은 곽 사장에게 순순히 전화를 걸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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