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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No! 군주!!

중앙일보

입력

밀라노 패션! 페라리 자동차! 세리에 A 축구! 오늘날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들이지만, 역사책을 뒤져보면 19세기까지 이탈리아가 세계사의 아이콘으로 크게 등장하는 것은 세 번뿐이다.

첫째는 고대의 로마 제국, 둘째는 중세의 르네상스, 셋째는 19세기에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때. 세계제국 로마와 문예부흥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탈리아는 왜 유럽 열강의 중심이 되기는커녕 19세기에 와서야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루었을까?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탈리아가 교황의 텃밭이었다는 데 있다. 중세 유럽의 교황은 말하자면 오늘날의 UN처럼 유럽 각국의 왕과 제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제관계의 교통정리를 도맡은 존재였다. 원래 중심은 변화의 속도가 느린 법. 변방의 에스파냐,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이 차례로 국가를 수립하고 발흥할 때도, 유럽의 낡은 중심 이탈리아에는 그런 변화의 물결이 미치지 못하고 노상 도시국가들로 분립된 상태를 면치 못한다.

난세에는 인물이 나오게 마련이다. 중국사에서도 고대 춘추 전국 시대의 기나긴 분열 시대에는 제자백가로 불리는 뛰어난 책략가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았던가?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던 15세기 이탈리아에서도 조국의 분열과 후진성을 심각하게 여기고 탁월한 부국강병책을 제시한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마키아벨리이며, 이탈리아판 〈손자병법〉이라 할 그의 저서가 바로 〈군주론〉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제자백가로 치면 손자보다 순자(荀子)에 가깝다. 우선 그는 철저히 '성악설'의 입장을 취한다. "인간이란 원래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요, 염치가 없고, 제 몸을 아끼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다." 이런 말을 듣고 거울 보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기를!

이렇듯 지독하게 부정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마키아벨리의 도덕성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철학이나 도덕에서 말하는 인간과 정치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다르기 때문이다.

군주(君主)는 군자(君子)가 아니다. 백성들의 행복만을 배려하는 현군(賢君)은 오히려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다. 또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추구하려는 성군(聖君)은 귀족과 군대의 눈치만 보는 겁쟁이다. 군주는 무엇보다 과감성과 결단성이라는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전쟁이란 피할 수 없을 때 결단을 못 내리면 본인에게 손해만 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럼 혹시 마키아벨리는 19세기 유럽사에 등장하는 쇼비니스트나 징고이스트 같은 전쟁광? 천만에! 그는 군주의 자질이 언제나 변함없이 똑같다고 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즉위 과정에 문제가 없는 세습 군주는 권력의 정통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비교적 덕치(德治)로써도 귀족과 백성의 신망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가문 출신의 신흥 군주라면 덕치보다는 오히려 전제정치로써 강력한 힘을 보여야만 한다(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5공화국의 전두환씨도 그래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제에만 의존한다면 권력이 오래 갈 수 없다.

따라서 군주에게는 양면성이 필요하다. 이런 양면성을 가리켜 마키아벨리는 유명한 '여우와 사자'를 얘기한다. "사자는 책략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의 힘을 당하지 못한다. 따라서 함정을 알아차릴 때는 여우여야 하고, 늑대의 혼을 빼려면 사자여야 한다"(차라리 전두환씨가 여우였다면!)

군주에게 사나움이라는 야성과 교활함이라는 지성(?)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관은 성군이나 현군의 군주관에 익숙한 동양식 사고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당시 유럽의 지배적인 사상과도 맞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시대에도 이미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배척되고 금기시되었다(프로이센을 강국으로 성장시킨 자칭 계몽군주 프리드리히는 반마키아벨리론을 주창했으면서도 막상 그 자신은 대표적인 마키아벨리적 군주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용어가, 목적을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수단까지도 거리낌없이 사용하는 권모술수적인 정치관과 행동론을 가리키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는 걸 보면 무덤 속의 마키아벨리는 어떤 심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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