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뽐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39호 31면

네덜란드에서는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이라 해도 뽐내는 법이 없다. 허례허식이 없고 실질적이다. 부자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이나 옷차림도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 자신의 존재를 과장되게 드러내는 것을 창피하고 속물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사회 저변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삶에서 겉치레보다 사회봉사와 내면의 만족을 추구한다. 그래서 평범한 식당에서 우연히 총리와 마주치기도 하고, 국제기구 수장이나 고위 인사들이 수행원 없이 자전거로 다니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총리나 장관 등 고위직 인사들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 사직한다는 소식을 흔히 접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1. 이태 전 바세나르에 있는 임차한 집으로 입주하기 전, 집안 몇 곳을 도색하고 수리하는 작업을 할 때였다. 점퍼 차림의 노인이 집안 이곳저곳을 살펴 보기에 공사하는 인부 중 한 명인 줄 알았는데 인사를 나눠 보니 집주인 반 덴 회블(van den Heuvel)이었다. 상당한 시간이 흘러 우연히 그가 대단한 부자인 걸 알게 됐다. 그는 선박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했고 현재는 부동산 재벌이었다. 그 후 간혹 음악공연장·헬스클럽에서 만나기도 하고 그가 사는 집에도 가 봤지만 외양으로는 큰 부자라고 할 특별한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네덜란드에는 대단한 부자가 많다고 하는데, 대부분 반 덴 회블처럼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말은 네덜란드 부자들에게 꼭 맞는 말이다.

#2. 지난해 4월. 주네덜란드대사가 암스테르담 시내의 한 호텔에 빔 콕(Wim Kok) 전 총리를 초청한 오찬행사 때 동석한 적이 있었다. 호텔 로비에 훤칠한 키의 노신사 한 분이 손수 가방을 들고 나타난 것도 의외였다. 오찬 후에는 운전기사 또는 보좌관이 콕 전 총리를 모시고 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 예측도 빗나갔다. 콕 전 총리가 성큼성큼 걸어 호텔 앞 주차장으로 가서는 헙수룩한 차 한 대를 직접 몰더니 호텔 입구에 서 있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왜건형 차는 비교적 값이 싼 평범한 차였다. 이후에도 콕 전 총리를 몇 차례 더 만난 적이 있는데 언제나 그 낡은 애마를 직접 몰고 나타나곤 했다. 콕 전 총리는 1982년 노사정 타협의 세계적 모범 사례인 ‘바세나르 협약’이 성사될 당시 노동계 대표였다. 노동당수를 맡은 그는 94년부터 8년간 보수당인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해 총리로서 연정을 두 차례 성공적으로 이끈 대타협의 명수였다.

#3. 2005년 8월 17일 저녁이었다. 호주 캔버라에 있는 주호주 대사관저에서 육군참모총장 등 호주 군 최고위 인사들을 부부 동반으로 초청하는 행사가 열렸다. 헐리(Hurley) 전략증강사령관의 부인이 그곳 캔버라 한인교회에 다니는 몇몇 한국 아이의 이름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해 그 이유를 물었다. 헐리 부인은 한국 아이들이 인근 초등학교에 다니는데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이라고 답했다. 남편의 주둔지에 따라 해외에 파견됐다가 귀국하면 언제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왔고 그 일이 아주 즐겁고 보람된다고 했다. 이후 교회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헐리 선생의 남편을 그냥 직업군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호주군 고위 지휘관 사모님이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남편을 그저 군인이라고만 알린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재 호주군 합참의장인 데이비드 존 헐리 대장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는 때는 언제쯤일까?



곽성규 서울대와 미국 조지아주립대에서 공부했다. 직업 외교관으로 중국·이스라엘·호주·방글라데시에서 근무하고 외교부 중동과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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