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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만 산에 오르는 걸까 … 하산하면 마음이 변하는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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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사흘간의 휴일. 추석 연휴의 약발이 떨어질 즈음 만난 달콤한 시간. 전국의 명승·관광지가 행락객으로 미어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지리산에 다녀왔거든요. 성삼재~천왕봉~중산리에 이르는 33.4㎞ 종주코스. 솔직히 지금도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닙니다. 걸을 때마다 후들거립니다. 종주라고는 하지만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 46.3㎞)나 태극종주(약 100㎞)에 비하면 쉬운 코스였지요. 그래도 초보인 저는 뿌듯합니다.

 산에 오를 때마다 아, 이런 사람들하고만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좁은 등산로에서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들을 합니다. 먼저 지나가게 기다려주면 반드시 “고맙습니다”가 뒤따릅니다. 상대가 친절하니 나도 화답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낯빛이 환해지는 이유입니다. 서로 배려하는 것은 인사뿐이 아닙니다. 길을 물으면 누구든 자상하게 알려주고, 아프거나 다친 기색이 보이면 서로 돕겠다고 나섭니다. 세석대피소에서 식사할 때 우리 일행이 갖고 온 인스턴트 커피를 옆자리에 나눠주니 찐 달걀 한 꾸러미가 돌아오더군요. 대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원시공동체 같은 물물교환이나 울력이 산에서는 예사로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어진 사람이 산을 좋아한다니 원래 착한 사람들이 산에 오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사실 큰 산 대피소 같은 곳에서는 절도·폭행 사건이 아주 드뭅니다. 이번에 1박을 한 세석대피소는 남녀 잠자리 구분이 돼 있었지만, 지난봄 하루 묵은 설악산 중청대피소는 혼숙이었습니다. 그래도 성추행 같은 범죄는 딴 세상 이야기입니다. 다들 피로에 지쳐 코 골며 자기 바빴습니다. 물론 밥 먹듯 산을 타는 프로 산악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산도 무릉도원은 아니더군요. 예전에는 산악인들이 산 밑에 텐트 쳐놓고 암벽등반을 다녀와도 두고 간 장비가 멀쩡했는데, 언제부턴가 텐트째 없어지는 일이 가끔 생긴다고 합니다. 비싼 등산용품을 도난당하는 일도 있고요. 지리산만 해도 세석·벽소령 두 대피소에 요금 1000원을 받는 물품보관함이 설치됐습니다.

 그래도 산 밑 세상에 비하면 약과이지요. 무엇보다 자기 장비도 무거워 죽겠는데 남의 것 탐낼 엄두가 나겠습니까. 그렇다면 착하지 않은 사람도 산에 올라가면 저절로 착해진다는 얘기일까요.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된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산에서는 착하던 사람들이 산 아래에만 내려가면 다시 못된 본성이 머리를 내민다고 보아야 옳은지요.

 등산의 즐거움은 고단함 뒤에 옵니다. ‘골프 접대’라는 말은 있어도 ‘등산 접대’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고단함의 비중이 너무 커 아부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으니 그렇겠지요. 저는 통천문(通天門·해발 1814m)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올라갈 때 하늘로 통하고 내려갈 때는 땅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그 통천문이 무너져 산 위, 산 아래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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