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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들 떠난 고시원 … 누군가 남아 꿈을 키우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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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주거지 명칭은 변하게 마련이다. 이름이 바뀌기도 하고, 이름은 그대로인데 의미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옛날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였던 ‘맨션’은 조그마한 다가구주택에도 따라붙는 이름이 됐다. ‘○○빌라’로 불리는 연립주택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고시원도 마찬가지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이제 고시원에는 고시생이 없다. 책꽂이에 그득한 법전과 꼬질꼬질 때 묻은 파란색 트레이닝복으로 대변되던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과거 고시생들은 고시원 쪽방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었다. 인생역전, 단 한 방에 파란색 트레이닝복이 법복으로 바뀌는 꿈을 꾸었다. 이제는 일용직 노동자와 상경 대학생, 주거비가 모자라는 직장인들이 고시원의 대세가 됐다. 케이블 TV의 장기방영 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에 나오는 정지순도 고시원에 산다. 온갖 진상을 떠는 캐릭터지만 시골에 사는 홀어머니·동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는 노총각이다.

 고시원에서 고시생이 사라지자 새로 고시원 건물이 들어서려 하면 이웃 주민들이 반대하는 경우가 늘었다. 주거환경을 해친다는 이유다. 사고도 잦았다. 2008년 7월 용인의 고시원에서 불이 나 7명이 희생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 논현동 고시원에 살던 30대 남자가 고시원 건물에 불을 지르고 흉기를 휘둘러 6명이나 숨졌다. 3명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바다를 건너 온 중국동포들이었다. 지난해 9월에도 서울 신천동 고시원에 불이 나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어둡고 지질한 이미지가 고시원의 전부일까. 서울에서 고시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1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인구의 1% 수준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돈이 없거나 모자란다는 것뿐이다. 그들도 저마다 꿈을 꾸고 있다. 그제 장례식이 치러진 ‘짜장면 천사’ 김우수씨는 서울 논현동의 4.95㎡(약 1.5평)짜리 고시원에서 살았다. 짜장면 배달 일로 월 70만원가량을 벌면서도 어려운 처지의 다섯 어린이를 후원했다. 진작에 사후 장기기증을 서약했고, 종신보험금 4000만원은 어린이재단 앞으로 해놓았다고 한다. 창문도 없는, 발도 뻗기조차 힘든 좁은 방에서 그가 꾼 꿈은 자신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내는 이가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 산다/ 한때는 야망을 품고 이곳에 왔고/ 한때는 갈 곳이 없어 이곳에 왔으나//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차창룡, ‘고시원에서’ 부분).

 부산이 고향인 김우수씨는 미혼모의 아이였고, 7세에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한다. 12세 때 고아원을 뛰쳐나와 구걸·막노동 등 온갖 역경을 겪었다. 그도 자신을 내친 가족을 잊기 위해, 잊지 못해, 때로는 영영 헤어지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러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어린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고시생들의 입신양명의 꿈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꿈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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