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인터뷰] 대한상공회의소 박용성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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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공회의소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사무국의 55개 실.팀을 절반 가까이로 줄여 업무의 밀도를 높였다.

회원사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싶은 부서는 과감히 통.폐합했다. 회장이 밤낮으로 쏟아내는 e-메일 업무 지시에 임직원들이 정신을 못차릴 정도다.

'PC로 업무를 처리하지 못하면 관리자 자격이 없다' 는 호령에 간부들 사이에 컴퓨터 배우기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9일 제17대 대한상의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이런 변화를 진두지휘하는 박용성(朴容晟.60)OB맥주 회장을 양재찬(梁在燦)산업부장이 만났다.

30분 단위로 짜인 빡빡한 일정 때문에 지난 17일 일과를 시작하기 전인 오전 8시 朴회장 집무실에서 1시간 남짓 만나 개혁 구상을 들었다.

-상의 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해외 출장이 잦은데 요즘도 노트북을 가져갑니까.

“물론이지요.(웃으며)그것 없으면 시체입니다.우선 신문을 못 보잖아요.그전에는 본사에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팩스로 보냈는데 요즘은 국내외 신문을 인터넷으로 챙깁니다.”

-상의 직원들이 요즘 바싹 긴장해 있답니다.조직을 크게 바꾼다고 들었는데요.

“회원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모든 업무를 제로 베이스에서 검토하고 있습니다.그저 관행적으로 해온 일은 과감히 없애겠습니다.6월부터 새롭게 시작할 계획인데,우선 팀을 절반으로 줄이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상의를 어떻게 운영할 계획입니까.

”인터넷 시대다,전자상거래 시대다 하는데 지방에선 아직도 이런 물결에 둔합디다.특히 중소기업들은 서울 테헤란로를 먼 나라 이란의 수도로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직원이 수십명인데도 e-메일조차 안쓰는 곳이 많아요.이 분야를 서비스하는 게 가장 시급합니다.”

-지방 중소기업의 정보화 실상이 그렇다면 여러 경제단체가 회원사인 기업에게 그동안 정보화
의 중요성을 제대로 일깨우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경제단체들이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조직화·네트워크화하는 게 드물었기 때문이지요.전국적인 지방조직과 크고 작은 모든 업종의 기업을 회원으로 둔 대한상의가 이런 일을 하기에 적격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지난 10년동안 산업정책을 좌우할만한 정책 제안을 대한상의가 앞장서 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요.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따끈따끈한 뉴스가 많이 나온 게 사실이지요.대한상의는 다양한 규모의 기업들 뜻을 모아 세제개편 같은 종합적인 건의에 주력하다 보니 뜨뜨미지근하게 비쳐졌을 수 있습니다.”

-지난 9일 취임하면서 ‘경제단체 가운데 상의를 맨 앞에 놓아달라’고 여러 차례 주문하셨지요.이를 두고 전경련이 조금 불편해 하는 기색이라고 들었습니다.

“역사가 가장 길고 회원수도 가장 많다는 점에서 당연한 얘기지요.그렇다고 전경련을 누르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대기업과 정부가 밀고 당기면서 전경련의 뉴스 비중이 커졌고 단체장 모임에서 단체 이름이 언급되는 순서의 원칙이 무너졌지요.(웃으며)가나다 순으로도 대한상의가 맨 앞이 아닌가요.”

-경제단체의 맏형 노릇을 하겠다고 하셨는데,그러려면 그에 걸맞는 전문성부터 갖춰야 할텐데요.

“아웃소싱을 적극 활용할 계획입니다.임직원에게 적절한 코디네이터가 되라고 강조했습니다.요즘 일부 기업들은 경리 업무까지 아웃소싱하고 있습니다.떠넘길 것은 과감히 떠넘겨야지요.”

-취임한 그날 상의 회장단의 청와대 오찬이 화제입니다.전경련 신임 회장단은 청와대에서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그날 대통령이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나는 신세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남은 3년 임기동안 끝까지 개혁하다 갈 테니 여러분들이 잘 도와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정부의 경제개혁 드라이브가 올바른 방향이라 하더라도 오래 지속하다 보면 기업 입장에서 일
종의 피로증이랄까 면역효과랄까 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는데요.

“기업 경영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누가 해라 말아라 할 게 아니지요.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할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이에 비해 공공·노사 부문의 개혁이 상대적으로 덜 됐다고 봅니다.그러므로 기업만큼 절실하게 개혁했는지 반성해 보아야지요.정부도 개혁의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기업은 생명체인데 이리저리 뜯어내는 식의 개혁은 곤란하지요.”

-두산의 구조조정은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외환위기를 예견해 구조조정의 모범을 보였다고들 말하는데요.

“선견지명이란 표현은 과찬이지요.(웃으며)물이 여기저기 차서 꼴깍꼴깍 숨넘어갈 것 같아 남보다 일찍 시작한 것입니다.이 정도면 되겠다 싶었는데 외환위기가 닥쳐 두번 구조조정을 했습니다.사실 구조조정은 끝없는 작업입니다.두산은 요즘도 두세달에 한번씩 회사 없애고 합치고 나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실기업은 팔리지 않는다는 朴회장의 걸레론이 지금도 화제입니다.그래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려운 점이 있었을텐데요.

“알짜기업을 팔겠다니까 ‘두산이 갈 데까지 가서 빚잔치 하는구나’하는 식으로 보더군요.은행들이 대출을 회수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습니다.어떤 기업인은 ‘팔아서 하는 구조조정 누가 못하냐’라고 비아냥거렸는데,사실 못팔고 붙들고 있다가 망한 회사가 한둘이 아니잖아요.이런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 곳이 외부 컨설팅 회사(매킨지)입니다.우리 기업은 컨설팅 회사에서 ‘전략’(경영철학·발상의 전환 등을 지칭)을 배워야지 ‘전투 방법’까지 배우려 드는 것은 과욕입니다.”

-최근 몇몇 기업의 구조조정 내용을 보면 두산처럼 오른팔을 자르는 수준에 못 미치는 것 같은데요.

“아직 여유가 있기 때문이겠지요.어려우면 사지(四肢)를 자르고도 살아남겠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투자자들이 냉정해지고 시장도 기업의 재무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그런데 정작 기업은 아직도 시장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지적이 나오는데요.

“미국 기업의 시장가치는 장부가격의 평균 세배라고 합니다.그런데 우리나라는 같거나 오히려 밑돕니다.미국 기업들은 무형자산·상표권·노하우처럼 숨은 경쟁력이 큰 데 비해 우리는 부동산같은 유형자산의 값을 오히려 시가보다 낮게 매겨 재산을 숨기기 때문입니다.그래도 전반적으로 투자 관행이 상당히 달라졌습니다.경기가 이 정도 호전됐으면 땅값이 들먹일만도 한데 요즘 그런 조짐이 없지 않습니까.국민들이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지요.”

-북한이 최근 국제상업회의소(ICC)에 가입했습니다.북한 상의와 연결해 대한상의가 남북경협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나요.

“북한에도 상공회의소가 설립돼 이제 대화 상대가 생겼습니다.직원도 10여명 된다고 합니다.앞으로 남북경협은 북한 상의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주한미상의 등 외국기업 단체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대한상의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아쉽게도 대한상의의 해외 주재원은 중국 베이징의 한사람뿐입니다.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 때 해외에 나간 무역회사 중심으로 모인 상사협의회가 있는 정도랍니다.그러나 이젠 서비스·항공·금융·제조 등 다양한 업종이 진출하지 않았습니까.이들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려면 법인격을 갖춘 상의 조직이 필요하지요.미국은 전 세계에 1백10여군데,일본은 80여군데에 상의 조직을 두고 있습니다.”

-해외에 대한상의 조직이 생기면 무역분쟁이 벌어질 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선진국에선 상공회의소라는 명함을 내밀어야 제대로 상대합니다.언어도 중요하지요.현지 국적 인사를 채용해 해당 국가와 지자체에 우리 이익을 대변토록 해야지요.현재의 친목단체 수준으론 곤란합니다.이달 중 미국·일본의 상의 조직 구축 방안을 현지 기업인과 논의할 작정입니다.문제는 예산인데 정부와 협의할 계획입니다.”

-주한 외국기업이나 벤처기업과 손잡는 것도 필요할텐데요.

“6월 초 주한 외국기업 인사를 초청해 외국기업위원회와 무역투자위원회를 설치하는 문제를 협의하겠습니다.외국인 투자기업의 공장은 대부분 지방에 있는데 관공서에서 일보는 것과 노사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합니다.적극 도와줄테니 회원으로 들어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할 생각입니다.외국기업 위원장에는 외국인을 채용할 계획입니다.”

-최근 토요 휴무제와 근로시간 단축이 논쟁 거리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토요 근무를 일률적으로 없애면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 더 큰 타격을 봅니다.기업체의 근무 패턴까지 외부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곤란하지요.개별 기업이 필요에 따라 바꾸는 게 바람직합니다.이미 격주 토요휴무제를 도입한 곳이 꽤 있지 않습니까.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존중해야지요.”

-앞으로 대한상의와 두산 일의 비중을 어떻게 두겠습니까.

“하루 반나절만 상의 일을 보면 될 것 같아요.e-메일·전화로 이야기하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두산그룹 일은 동생(박용만 사장)에 실무를 많이 넘겨주었거든요.”

-상의 회장이 되면 갑자기 ‘자리’가 많이 생긴다고 하던데요.
“(웃으며)하도 많이 불려 다녀 하루 세끼 걱정 안해도 될 정도랍니다.전임 김상하 회장으로부
터 넘겨받은 직함이 1백개 가까운데 이것저것 정리하고도 90개쯤 남았습니다.”

-요즘도 사진 촬영을 자주 하는가.

“봄철이라서 요즘 야생화 촬영을 이따끔 나갑니다.5월 말과 6월 초가 꽃 촬영의 절정기지요.동아백과사전에 오른 사진 가운데(내가) 찍은 게 많습니다.”

만난 사람=양재찬 산업부장
정리=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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