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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모닝글로리’ 부도의 교훈 잊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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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유성펜은 일본 미쓰비시사의 ‘제트스트림’, 볼펜은 미국의 ‘BIC’, 투명테이프와 접착식 메모지는 미국의 ‘3M’…. 한 대형 문구 유통업체의 판매 1위 제품들이다. 이뿐 아니다. 지우개와 일반 연필은 독일의 ‘파버 카스텔’ 제품이, 소묘 연필은 일본의 ‘톰보’와 독일의 ‘스테들러’ 제품이 가장 많이 팔린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요즘 말로 ‘지못미’다. 국내 중소 문구업체를 보는 정부 심정이 그럴 것이다. 시장을 모조리 잠식당한 상황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정부가 처음부터 중소 문구업체들을 내팽개친 건 아니다. 오히려 지켜주려 했다. 1983년 정부는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만든다. 대기업 진출을 제한해 중소업체를 보호한다는 취지였다. 이 ‘고유업종’에 문구류가 포함돼 있었다.

 효과가 없지 않았다. 모나미·모닝글로리·바른손 등 중소 문구업체가 기회를 살려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문구류 시장 개방과 함께 위기가 닥쳤다. 기술력을 앞세운 외산 문구류가 쏟아져 들어왔다. 국내 중소기업들은 금세 휘청거렸다. 문구 시장 대표 기업인 모닝글로리가 98년 부도를 맞을 만큼 타격이 컸다. 지금은 국내 필기구 시장의 70%를 일본산이 차지하고 있다.

 벽쌓기로는 중소기업을 지킬 수 없다. 문구류 시장이 남긴 교훈이다. 벽을 쌓아 대기업 진출을 막는다고 우리 중소기업만 뛰어놀 수 있는 무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무역협정(FTA)이 잇따라 체결되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정부도 문제를 인정했다. 2006년 중소기업 고유업종 제도를 폐지하며 “중소 기업은 품질보다 가격 경쟁에 몰두해 기술력을 앞세운 외국 기업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고 밝혔다.

 27일 16개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발표한 동반성장위원회도 이런 역사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행했다. 우연인지, 간장·된장·순대같이 외국 기업이 비교적 진출하지 않을 것 같은 품목이 많긴 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다. 스위스 식품업체 네슬레가 홍콩 두부 시장에서 1등을 하는 세상이다. “성 동쪽 문은 뚫렸는데 서쪽 문 닫는 꼴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조성봉 박사의 말이다. 성문이 이미 뚫렸다면 무기부터 챙길 때다.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우선이라는 얘기다.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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