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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불편한 진실의 고발자, 입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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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그림 ③ 불안(1894), 에드바르 뭉크 작, 캔버스에 유채, 94x74㎝, 뭉크 미술관, 오슬로


“자네도 내가 겪은 상황을 겪을 거야. 적이 많아질수록 친구도 많아진다네!”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가 혹평에 난타 당하던 젊은 시절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1828~1906)이 전시회를 찾아와 해준 말이다. 당시 노년의 대(大)작가였던 입센 역시 ‘불편한 진실의 폭로’라는 문제를 계속 건드리면서 온갖 악평에 시달려 왔다. 불편한 진실이란 게, 화제의 영화 ‘도가니’의 실화처럼 만인이 공분하는 일이라도 그것을 덮어두고 싶어하는 세력과의 싸움은 쉽지 않은 법이다. 하물며 입센은 ‘위선적 평화를 유지하는 가정은 진실을 밝히고 해체하는 게 낫다’는, 현대인의 반응조차 다소 엇갈릴 명제를 『인형의 집』과 『유령』을 통해 보수적인 19세기 사회에 던졌던 것이다.

그림 ④ 절규(비명1893), 에드바르뭉크 작, 마분지에 유채, 템페라, 파스텔, 91×73.5㎝, 국립미술관, 오슬로

입센과 뭉크는 각각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와 화가이며 둘 다 근대 유럽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입센이 뭉크의 1895년 전시회를 특별 방문해 위로해준 이후 서로에게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젊은 뭉크는 입센에게 강한 영감을 받아 입센의 초상화를 그의 생전과 사후에 종종 그렸다. 그중 하나(그림 ①)를 보면 입센은 마치 신비한 안개 같은 담배 연기에 둘러싸여 선지자의 얼굴로 관람자를 꿰뚫어보고 있다.

 뭉크는 또 입센의 여러 희곡을 읽고 작품 속 몇몇 인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그와 관련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입센의 『유령(Gengangere·1881)』의 경우 뭉크는 그 작품 상연을 위한 무대 컨셉트 아트를 의뢰받기도 했다(그림 ②).

 『유령』은 입센의 대표작 『인형의 집(Et Dukkehjem·1879)』과 관련된 작품이다. 『인형의 집』에서 주인공 노라는 신혼 시절 남편이 위독했을 때 대금업자에게 급히 돈을 빌려 요양비를 마련했고 그 뒤 남편 몰래 부업을 하면서 이 돈을 갚아 나간다. 노라는 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자신을 귀여운 어린애로만 생각하는 남편이 자존심 상할까 봐 말하지 못한다. 그런데 당시 노라가 이미 사망한 친정아버지를 보증인으로 세웠던 일로 대금업자가 남편을 협박하면서 남편도 이 일을 알게 된다. 그는 노라가 철없는 짓을 해 자신의 명예를 망쳤다며 욕을 퍼붓고 노라는 환멸에 빠진다. 나중에 협박 사건은 잘 해결되지만 노라는 남편에게 “나는 그간 당신의 인형에 불과했어요”라고 말하고 집을 나간다. 남편이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논하며 말리자 “나는 그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에 대한 의무를 다해야겠어요”라고 외친다.

그림 ① 그랑 카페의 입센(1908), 에드바르 뭉크 작, 캔버스에 유채, 115x180.5㎝, 뭉크 미술관, 노르웨이 오슬로

 이 작품은 처음 나왔을 때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민주주의와 평등을 입에 달고 사는 남성 지식인들도 그것을 가정과 부부관계에 적용하는 것은 대부분 원치 않았던 반면 입센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참다운 진보주의자로 지금까지 평가받는 동시에 당시에는 가정파괴를 부추긴다는 비난을 엄청나게 받았다. 그러자 투사 기질이 있는 입센은 더 ‘센’ 후속작을 내놓았다. ‘억지로 가정을 지키면 만사 잘될 줄 알아?’라는 주제를 담은 『유령』이다.

 주인공 알빙 부인은 남편 알빙 대위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그를 기념하는 고아원 개관을 앞두고 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화가인 아들 오스왈드도 오랜만에 집에 왔고, 고아원 행정 일을 맡아 볼 오랜 친구 만데르스 목사도 방문했다. 그러나 축하로 넘쳐야 할 집에 음산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돈다. 이들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알빙 부인은 결혼 1년 만에 집을 뛰쳐나갔었다. 결혼 전 시작된 알빙 대위의 방탕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의 설득으로 집으로 돌아갔고, 그 뒤 오스왈드가 태어났다. 알빙 대위는 지역의 자선가로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목사는 자기 덕에 모든 게 잘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고 알빙 부인이 고백한다. 남편은 죽는 날까지 난봉꾼이었고 결국 죽은 것도 성병(性病) 때문이었다고. 오스왈드를 일찍부터 외국에 보낸 것도, 남편의 이름으로 고아원을 지은 것도 모두 그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였다고. “평생 내 아이에게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숨기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어요.”

그림 ② 헨리크 입센의 『유령』의 장면(1906), 에드바르 뭉크 작, 캔버스에 템페라, 61x99.5㎝, 바젤 미술관, 스위스 바젤



 목사는 그것 또한 잘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알빙 부인은 확신이 없으며 불안에 싸여 있다. 결국 환부가 곪아터진다. 오스왈드와 집의 하녀인 레지네가 연애하는 기색이 보이자 알빙 부인은 레지네가 알빙 대위의 사생아, 즉 오스왈드의 배다른 누이임을 밝혀야 할 기로에 놓인다. 게다가 오스왈드는 집에 돌아온 것이 치명적인 뇌 질환의 발작 때문이었음을 고백한다. 의사는 그것이 부친의 성병 때문에 선천적으로 얻은 병이라고 말해주지만 오스왈드는 믿지 못한다. 마침내 알빙 부인은 진실을 밝히고, 오스왈드는 자신이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키는 날 완전히 제정신을 잃을 것이라면서 알빙 부인에게 안락사(安樂死)를 부탁한다. 그리고 동이 트는 순간 발작을 일으키며 “어머니, 태양을 주세요”라고 말한다.

 성병, 출생의 비밀, 근친 연애, 안락사 등이 나오는 이 극을 보면서 요즘 TV의 막장 드라마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난데없이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의 억지 화해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막장 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은 불편한 진실의 은폐는 더 큰 비극을 초래한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며 끝난다. 제목 『유령』은 죽은 알빙 대위의 악덕이 그의 아들딸 세대에 가져온 재앙인 동시에 알빙 부인이 그 재앙을 미리 떨쳐버리지 못하게 만든 낡은 도덕관과 인습을 상징한다.

 뭉크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센의 생각에 얼마나 공감했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뭉크는 『유령』에서 진실의 은폐와 허위로 지탱되는 사회 밑에 흐르는 은밀한 공포와 참을 수 없는 불안의 정서에 깊이 공감했다. 그것은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뭉크도 평소 느끼던 것이었다. 뭉크가 자신의 대표작 ‘절규’(그림 ④)와 매우 닮게 그린 ‘불안’(그림 ③)을 보면 핏빛 노을 아래 모두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인물 군상의 그로테스크하고 공허한 얼굴이 흡사 유령에 씐 사람들 같다. 그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가 『유령』을 읽기 전인지 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그림은 알빙 부인의 대사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다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없어진 생각들과 마음 같은 것들이 우리한테 붙어 다닌단 말이에요.”

문소영 기자

내놓는 작품마다 사회 파문 … 전투적 극작가 입센

입센(사진)은 젊은 시절 실패를 거듭하다 『브랑(Brand·1866)』과 『페르 귄트(Peer Gynt·1867)』를 발표하면서 드디어 명성을 얻었다. 그 후 사회적 이슈를 다룬 『인형의 집』과 『유령』을 발표하면서 당대 가장 논쟁적인 작가이자 사실주의 근대극의 창시자가 됐다. 『유령』이 비평가와 대중에게 난타당하고 부도덕한 극이란 이유로 여러 지역에서 상연 금지되자 입센은 『민중의 적(En Folkefiende·1882)』을 내놨는데, 이것은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는 지식인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처럼 입센의 극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다루 지만 상징적이고 시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뭉크 같은 미술가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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