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112) 표절의 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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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를 맛본 사건이었다. 1971년 ‘연애교실’로 감독 데뷔한 나는 후속작을 찾고 있었다. 그 해 어느 날 TBC 방송국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TBC 본사로 들어갔을 때, 이건희 이사(현 삼성전자 회장)와 김규 상무가 나를 맞이했다. 이 이사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이 토크쇼 ‘회전목마’ 진행을 제안했다. 나는 MC에 별 재능이 없었다.

 출연이 성사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김 상무는 미국에서 본 영화 이야기였다. 영화 소재를 고민하고 있던 나는 ‘바로 이거다’라고 무릎을 탁 쳤다.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스토리’였다. 김 상무는 “손수건으로 7번이나 눈물을 닦으며 봐야 한다는 뜻에서 미국인 사이에 ‘Seven Handkerchief Movie’로 불린다”고 했다. 갑부의 아들인 아이스하키 선수 남주인공과 이탈리아 이민자의 가난한 딸 여주인공이 대학도서관에서 만나고, 여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다는 기막힌 드라마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구하기 힘들었다. 일본 시나리오를 번역해 읽어보니 당장 내가 촬영해야 할 작품이었다. 표절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빨리 번안작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연애교실’에서 내가 발탁한 신인 신영일과 나오미를 이 작품의 연인으로 다시 세웠다. 남주인공이 아이스하키 선수라는 점이 국내 상황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남주인공을 수영 선수로 바꾸었다. 신영일은 원래 유도를 한 데다 어깨가 딱 벌어져 몸이 멋졌다. 여주인공이 문제였다. 두 번째 영화인 나오미에겐 여주인공 역할이 과중했다. 촬영 하루 만에 나오미에게 양해를 구하고, 문희를 캐스팅 했다. 제목은 ‘어느 사랑의 이야기’로 결정됐다.

 국도극장에 ‘어느 사랑의 이야기’ 예고 간판을 걸었다. 작품은 참 예쁘게 나왔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국제영화사가 표절 시비를 걸었다. 그들이 원작 ‘러브스토리’를 7만 달러라는 거액의 개런티로 수입 계약한 것이다. 문화공보부가 ‘국제영화사의 항의가 이유 있다’고 받아들였고, ‘어느 사랑의 이야기’는 상영금지 조치를 받았다. ‘러브스토리’가 수입됐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느 사랑의 이야기’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고 간판이 내려갔다. ‘나는 망했구나’라고 혼자서 탄식했다. 당시 충무로의 대단한 화제였다.

 그 무렵 국무총리인 JP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 가끔 영화를 보는 JP는 윤주영 문공부 장관에게 “요즘 볼 영화가 없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마침 신성일이 제작해 상영금지 당한 영화가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JP는 “한국영화 제작자가 손해를 안 보게 해”라고 지시했다. JP가 나를 배려한 것 같다.

 71년 9월 뜻밖에 재상영 허가가 나왔다. 국도극장에 다시 간판이 올라갔다. 그러나 한 번 입은 타격을 만회하지 못하고 상영 일주일 만에 종영됐다. 그래도 지방업자들이 필름을 사주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러브스토리’는 그 해 12월 국제극장에서 개봉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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