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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푸틴의 ‘러시아식 민주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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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러시아연구소장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4일 ‘통합러시아’의 전당대회에서 푸틴 총리를 당 대권 후보로 공식 추대함에 따라 내년 3월 예정된 대선에 푸틴이 단독 출마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푸틴은 메드베데프의 대권 양보에 차기 총리직 예약으로 화답했다. 이런 약속이 현실화되면 정치적 사제지간인 푸틴과 메드베데프에 의한 장기집권이 가능해진다.

 푸틴은 2000년 5월 48세의 나이로 크렘린 권좌에 등극해 임기 4년의 대통령직을 두 번 연임했다. 그는 2008년 대선 때 권력 연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심복인 메드베데프를 후계자로 발탁해 대선에서 당선시킨 후 스스로 총리가 됐다. 메드베데프는 집권 직후 푸틴과의 정치적 교감하에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는 개헌안을 전격 통과시켰다. 따라서 푸틴이 2012년 대선에서 성공할 경우 최대 2024년까지 21세기 차르로 남을 수 있게 되고, 뒤이어 메드베데프도 2036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산술적 추론이 가능하다.

 메드베데프가 집권한 지난 3년여 동안 러시아는 실세 총리와 후계 대통령이 견인하는 양두체제의 이중권력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은유적으로 설명하면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인 상황이 연출된 것인데, “절대권력은 절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정치학의 고전적 명제와 어긋나기에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권력구도 향방을 흥미롭게 지켜봐 왔다.

 메드베데프-푸틴 투톱체제는 우려와 달리 큰 파열음 없이 역할 분점의 형태를 갖추면서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해 왔다. 새로운 형태의 정치실험인 이중권력이 성공적으로 안착해 가고 있지만, 사실 양두체제는 러시아 특유의 일인 절대권력 정치문화와 서구 민주주의의 혼합이 낳은 ‘사생아’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 점은 이중권력이 출현한 배경을 설명하면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재임기간 8년 내내 70% 이상의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푸틴은 3선 개헌을 통해 권력을 연장해 갈 수 있었지만 슬라브 민족의 자존심, 러시아 민주주의에 대한 외부 세계의 평가를 의식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푸틴은 자신의 권력욕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이를 반영한 절묘한 선택이 양두체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3선 연임을 금지한 헌법상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준수하면서 정치권력을 놓지 않고 지속해 나가기 위한 고육지책인 것이다.

 푸틴의 국정 장악력과 국민적 지지도로 볼 때 내년 크렘린 입성이 거의 확실시된다. 문제는 푸틴의 재집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대권 이양 연출을 놓고 러시아 정치의 후진성을 지적하지만,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민주주의를 도입한 게 불과 20년밖에 안 되었고, 국가와 권력의 절대성이 사회 전반에 용인된 오랜 정치문화를 감안할 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가 새로운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천명한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서구가 생각하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정치와 경제에 권력으로 정의되는 국가가 개입하는 시장민주주의의 러시아적 수용인데, 이는 초(超)대통령제, 국가자본주의, 이중권력, 관리민주주의 등 러시아만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가 러시아의 독특한 정치경제 현상을 냉소하더라도 우리마저 여기에 부화뇌동할 필요는 없다. 러시아의 정치제도와 시장환경에 적응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푸틴으로의 권력 변동이 한·러 관계와 동북아 정치지형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강구하는 게 더 현명한 자세다. 한·러 간 지정학적·지경학적 연계성이 현저히 증대되어 가고 있는 객관적 현실을 명료히 인식하면서 이제 차분하게 푸틴 집권 3기 시대를 대비할 때다.

홍완석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러시아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