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기자의 푸드&메드] 같이 먹어도 되는 약인지 ‘DUR’ 확인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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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커피를 대여섯 잔 이상 마셔온 디자이너 정모(29·여)씨는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친구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커피를 즐겨 카페인 내성(耐性)이 생겼다”고 자신해 오던 터였다. 하지만 최근 그는 직장 회식 후 귀가 도중 ‘갑자기 가슴이 마구 뛰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증상을 경험했다.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었지만 술 탓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증상은 계속됐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송 맺혔다. 불안감에 인근 병원을 찾았지만 검사 결과 심장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정씨의 주치의는 ‘요즘 복용한 약’을 물었다. “치통·생리통 때문에 며칠 진통제 ○○을 복용했다”고 답변하자 의사는 “바로 그것”이라며 무릎을 탁 쳤다. 일부 진통제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 커피의 카페인과 함께 약효 상승작용을 일으킨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자주 지적받고 있는 약 병용(竝用) 금기의 한 사례다.

 이 정도는 약과다. 약과 다른 약(또는 건강기능식품·식품)을 무심코 함께 먹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를 수 있다. 체중 감량을 위해 펜플루라민과 펜터민을 섞어 복용한 사람이 숨진 사례도 여럿 있다. 1990년대 ‘펜펜’으로 유명세를 탄 이 사건은 궁합이 맞지 않는 약을 혼용하는 것(병용 금기를 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약에 취약한 연령대는 아기와 어린이다. 몸집이 작고 아직 면역기능이 완전하지 않아서다. 약은 대개 성인이 구입하며, 실제 약의 용량은 성인 대상의 임상연구를 통해 결정된다. 아기·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대개 ‘성인에게 안전하니까 어린이에게도 안전할 것’으로 추정하며, 성인의 절반 정도 용량을 복용하도록 하나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아기·어린이가 복용해선 안 되는 약을 우리 정부는 연령 금기약(소아 등 특정 연령대의 사용이 금지된 약)으로 규정하고 있다. 간 독성이 있는 타이레놀(성분명 아세트아미노펜)을 12세 미만 어린이에게 처방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좋은 예다.

 임신 중인 여성에게 처방해선 안 되는 약이 ‘임부 금기약’이다. 기형아 출산 등 태아에게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약들이다. 1950년대 사상 최악의 약화(藥禍)사고를 부른 ‘탈리도마이드’, 먹는 탈모 치료약 ‘프로페시아’, 일부 먹는 여드름약 ‘로아큐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엄밀히 말하면 여러 약을 함께 복용하면 어떻게 될지 꿰고 있는 의사나 약사는 없다. 전문약·일반약·허브·건강기능식품 등은 수천·수만 가지로 조합·혼합될 수 있어 이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위험성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앞선 IT 기술과 접목해 금기약을 처방·조제 단계에서 배제하도록 한 것이 의약품처방조제시스템(DUR)이다.

 DUR이 운영되는 병원·약국에서 금기약이 처방·조제되면 모니터의 팝업창에 ‘임부 금기약’ ‘연령 금기약’ ‘병용 금기약’ ‘성분별 중복 처방’ 등 경고문이 뜬다. 문제는 DUR이 채택된 뒤에도 연령 금기·병용 금기 처방 등이 연간 1만 건 이상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민주당 최영희 의원은 “올 8월 말 기준으로 전체 의료기관 중 95.9%가 DUR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2722개 의료기관은 아직 미설치 상태”라며 “병용 금기· 연령 금기의 90%가량이 DUR을 설치하지 않은 의료기관에서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여러 약을 복용 중인 노인이거나 약에 취약한 아기·어린이·임신부가 있다면 의사·약사에게 “먹어도 되는 약인지 DUR로 먼저 확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약화로부터 건강을 지키는 현명한 일이다.

박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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