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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함께] “아이는 모노톤에 집중 잘하죠…독자와 대화하려 여백 남겨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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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상그림책’ 시리즈 중 『생각연필』(논장) 삽화. 흰 종이 위에 놓아둔 연필에서 시작된 상상은 종탑의 구름, 하늘을 나는 새, 나무 앞의 여우로 모습을 바꿔가며 뻗어나간다. 작가는 “평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며 감정 이입이 돼 숨 막히고 힘들 때가 많다. ‘상상 그림책’은 조금 쉬고 싶을 때, 비교적 가벼운 주제를 담아 그린다”고 말했다.

그림책 최고의 영예라 꼽히는 라가치 대상을 받은 『마음의 집』(창비)에 그림을 그린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51). 폴란드 작가지만 첫 그림책부터 한국의 출판사에서 내기 시작해 한국에서만 15권을 출간한 그녀는 절반쯤 한국 작가다. 신작 『여자아이의 왕국』(창비)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작가를 23일 서울 홍익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여자아이의 왕국』은 생리를 경험한 모든 세대의 여자를 위한 책이에요. 생리 시기가 점점 빨라지잖아요. 아이가 어릴지라도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구나’라며 어른과 동질감을 느낄 수 있게 대화할 수 있지요. 남자가 읽는다면 여자를 더 쉽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기회가 될 것이고요. 사춘기 소녀만을 위한 책은 아니랍니다.”

 작가는 책에서 초경을 시작한 여자아이를 자기 왕국의 주인이 되어가는 ‘공주’에 비유한다.

 “아프고 외롭고 힘들었던, 제가 겪은 월경에 대한 모든 감정과 경험을 담았어요. 월경이 여자의 인생을 괴롭히는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폐경이 되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던 일인지 깨닫게 되더군요. 월경은 곧 여성성이었던 것이죠. 자기 왕국을 떳떳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세상 모든 여자들을 응원해주고 싶었어요.”

 그녀의 작품은 유아용 그림책이라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화려한 색감이나 원색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모노톤의 차분한 색조와 비유·상징 등을 사용한 시적인 문장까지 그림이나 글 모두 깊이 있다.

 “제 경우엔 원색 그림을 집중해서 보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모노톤을 쓰죠. 특별한 색에 꽂혀 흐름을 놓치게 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도록요. 강한 색을 쓸 경우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는 뜻이에요.”

 구석구석을 꽉 채우는 일도 없다. 최근 출간된 『생각연필』(논장) 등 ‘상상그림책’ 시리즈는 더욱 그렇다. ‘상상’ 시리즈는 다림질을 하다 눌러 붙은 자국, 연필의 뾰족한 심지 모양 등에서 점점 생각이 발전돼 다른 모양의 그림이 되어가는 기발한 과정을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색연필로 간단히 그린 듯한 그림을 제외하면 빈 공간이다.

 “제게 여백은 독자와 작가간 공동 창작으로의 초대이자 대화의 창이에요. 꽉 채우기보다는 여지를 남겨 나머지는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우게 하려는 것이죠.”

 이제는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그는 한국인 기획자 이지원씨를 만나면서 그림책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다. 폴란드에선 이룰 수 없었던 꿈이었다. 그는 “한국은 나를 작가로서 살게 해 준 제 2의 조국”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폴란드는 무척 아름다운 나라예요. 그러나 슬프게도 예술을 중시하지 않아요. 학교 교육도 규제투성이라 창의성을 키우기 힘들죠. 흔히 한국도 그렇다고들 하지만, 도서관에 가면 엄청나게 많은 그림책이 있잖아요. 폴란드에선 폴란드어로 된 그림책을 구하기조차 힘들답니다.”

이경희 기자

◆라가치상=세계 최대 어린이책 박람회인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그해 전세계 최고의 아동서에 주는 상. ‘픽션’ ‘논픽션’ ‘새로운 지평상(New Horizon)’ 등으로 나눠 시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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