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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3천년 전에도 사이버 공간은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숨었니?”

“숨었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에서 온 식구가 숨바꼭질을 했다. 기원전 6세기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착공됐다가 서기 132년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완성된 제우스 신전. 1백4개의 화려한 코린트식 기둥이 위용을 자랑했다 하나 지금은 15개의 기둥만 허허로이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신전 자리 주변의 나무들과 돌덩어리 몇 개를 은폐물 삼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숨바꼭질을 했다. 꺄르륵, 꺄르륵, 세 아이의 웃음소리가 청명한 하늘을 때린다. 서양미술의 뿌리를 알아보겠노라고, 더불어 그 문명의 힘의 원천을 이해해 보겠노라고 떠나온 한 달 보름간의 가족여행. 늘 이렇게 웃음으로 가득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은 ‘망중한(忙中閑)
’의 짬이고, 이제 우리는 제우스와 올림포스의 신들을 상대로 힘겨운 숨바꼭질을 벌여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오늘날 종교로서 그리스 신화를 믿는 이가 하나도 없으므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죽었다고.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올림포스의 신들은 과거 그들이 지중해 연안에서 누리던 영화보다 더 큰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있다.

제우스는 단지 특유의 탁월한 변신 능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췄을 뿐이다. 우리 가족은 바로 그의 고향에서 그런 그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변신한 제우스에게 속아 곡절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는 서양회화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만큼 제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서양미술의 큰 몫을 차지한다.

티치아노 '에우로페의 겁탈' 1559년.

제우스의 변신 능력은 다른 말로 하면 헛 이미지, 곧 ‘환영’을 만드는 능력이다. 착각하게 하는 능력이다. 따지고 보면 서양미술이라는 것도 사람의 눈에 착각을 일으키는 게 주된 관심사였다. 이같은 미술을 미술사는 자연주의 미술이라 부른다.

우리 눈에 환영을 불러오는데 모든 것을 바친 서양미술. 인류 문명 가운데 이렇듯 고도의 자연주의 미술을 창조한 문명은 서양문명밖에 없다. 그 미술이 변신을 밥 먹듯 해온, 그래서 또 무수한 환영을 만들어온 제우스를 홀대할 수는 없다.

많은 서양 예술가들의 붓 끝에서 제우스의 변신 기록이 생생히 되살아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에 대한 화답으로, 제우스는 서양미술로 하여금 완벽한 환영을 창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대가 티치아노가 그린 ‘에우로페의 겁탈’은 소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납치된 시돈의 공주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어느 날 해변에서 친구들과 놀던 에우로페 공주는 유리하는 소떼 가운데 무척이나 잘 생긴 흰 소 한 마리를 보았다. 처음에는 무서운 느낌이 들었으나 공주는 곧 그 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쓰다듬어도 보고 화관도 씌워 주었다.

흰 소는 공주의 손에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대담해진 공주는 그만 소의 등에 올라타고 말았다. 그것이 덫이었다. 소는 기다렸다는 듯 공주를 매단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놀란 공주가 도와달라며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다른 소녀들을 뒤로 하고 소는 빠른 속도로 크레타섬을 향해 헤엄쳐 갔다. 옷자락이 풀어지며 펄럭였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렇게 에우로페는 자신의 태를 묻었던 땅과 이별했다. 크레타에 도착한 흰 소가 제 모습을 드러내니 그가 곧 제우스였다. 불가항력적으로 제우스의 뜨거운 팔에 부둥켜안긴 에우로페는 그를 외면하듯 해변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그때 가물가물 보이던 바다는 아마 그녀의 한처럼 넘실댔으리라. 티치아노의 재기 넘치는 붓길은, 제우스의 바쁜 헤엄질에서 에게해보다 더 큰 욕정의 바다를 풀어내고, 안타까이 풀어져 나가는 여인의 옷에서 제물이 된 공주의 신세를 생생히 드러낸다.

클림트 '다나에' 1907~8년경

서양화가들에 의해 에우로페 못지않게 많이 그려진, 제우스의 희생양 가운데 하나가 다나에이다. 딸인 다나에가 낳은 자식, 그러니까 외손자가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들은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이 비극을 피해보고자 자신의 딸을 청동탑에 가두었다. 남자와의 접촉을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금비로 둔갑한 제우스는 비좁은 창 사이로 들어가 다나에에게 영웅 페르세우스를 남겼다. 제우스의 탁월한 변신 능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는 여인의 가랑이 사이에 금닢이 쏟아지는 장면으로 이를 형상화했다. 태아처럼 오그린 여인의 몸은 수태를 상징한다. 지금 그녀의 진한 도취는 제우스의 승리를 온몸으로 증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우로페와 다나에 이외에도 제우스는 백조로 변신해 레다를,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로 변신해 칼리스토를, 독수리로 변신해 아이기나를, 남편 암피트리온으로 변신해 알크메네를 각각 취했다.

제우스의 이와 같은 끝없는 변신을 그림과 조각으로 옮기면서 서양미술가들은 자연스레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데 있어서 눈을 속이는 것, 곧 환영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는 것을. ‘환영의 제국’ 서구가 주도하는 오늘의 세계는 이제 그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환영에 지배당하고 있다.

버추얼 리얼리티니, 사이버 스페이스니 하는 모든 것이 다 환영의 공간에 속하는 것이다. 그 이름 자체에 이미 환영의 의미가 들어 있다. 영화, 광고, 애니메이션, 게임, 인터넷, 매스미디어 등 현대의 모든 중심적 매체들 역시 철저히 환영의 방정식에 따라 나름대로의 진행궤도를 그리고 있다.

우리는 자칫 최근의 사이버 흐름을 전혀 새로운 양상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모두 제우스가 뿌린 환영의 씨앗이 발아한 것일 뿐이다. 서구 문명의 논리적인 귀결인 것이다.

이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우리는 21세기가 무조건적인 아시아의 세기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환영의 전통에 있어서는 서양이 동양보다 아직 훨씬 풍부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 시대, 이미지산업 시대의 주도권은 이처럼 환영의 문명으로서 서양 문명을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로서도 비로소 획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와 그곳에 뿌리를 둔 서양문명을 오늘 그 근본부터 새롭게 들여다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신화가 다시 씌어지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이용숙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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