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필수품은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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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호 10면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신사라면 우산과 유머를 갖고 다녀야 한다.” 흐리고 비가 자주 오는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유머만 갖고 다녀도 신사 소리를 들을 것이다.
신사는 아니지만 김 팀장은 항상 유머를 갖고 다닌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갖고 다니는 것은 유머가 아닌지도 모른다. 유머의 사전적 의미가 “남을 웃기는 말이나 행동”인데 그의 유머가 매번 남을 웃기는 데 성공하는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대부분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게 뭐야?”라는 핀잔을 받기 일쑤니까. 그의 유머는 웃기는 말과 행동이 아니라 웃기려는 말과 행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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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머는 일종의 언어유희, 그러니까 말장난이다. 가령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간 산을 오른다고 해 보자. 방금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온 사람처럼 산의 몸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는데 그렇게 안개가 자욱한 가을 산을 회사 동료들과 함께 오르고 있다고 해 보자. 김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 갖고 있던 유머를 꺼낸다. “원래 해가 뜨면 날이 개잖아. 그런데 해가 떠도 무슨 뿌연 연기 같은 것 때문에 날이 안 개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그랬대. ‘안 개네’라고 말이야. 그렇게 해서 ‘안개’가 된 거래.”

산 오르는 일만 해도 힘든데 김 팀장의 썰렁한 말장난 때문에 짜증이 난 누군가가 야유한다. “어휴, 그걸 유머라고 하는 거예요?”
유머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낙천적이다. 웬만한 야유는 추임새 정도로 받아들인다. “옛날에 양반집에는 다 유모가 있었어. 유모는 젖을 대신 먹여 주는 사람이니까 아이들이 유모를 좋아하고 따르지. 어떤 아이들은 안 자고 울고 떼를 쓰고 한단 말이야. 그러면 유모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줘. 원래 아이들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또 유모들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참 잘하거든. 그러니까 유모가 이야기만 하면 울던 아이들이 울음을 뚝 그치고 까르르 웃는단 말이지. 유머는 유모가 하는 말이라는 ‘유모어’에서 나온 말이래.”

이쯤 되면 아예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상수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한다. 이번 여름에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온 이 팀장이 호텔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이 팀장은 말장난을 전혀 하지 않고 사람들을 웃긴다. 사람들은 배를 잡고 웃는다. 아예 땅바닥에 쓰러져 웃는 사람도 있다. 유머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질투심이 많다. 자기중심적이다. 웃음의 중심에는 항상 자신이 있어야 한다. 이 팀장이 아니라 김 팀장이. 김 팀장은 갖고 있던 유머를 꺼낸다. “이 팀장이 일본 이야기하니까 나도 생각나는 게 있어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보면 옥희가 나오잖아. 옥희가 자라서 결혼을 했는데 무슨 일로 남편과 대판 싸우고는 집을 나왔어. 배 타고 일본으로 도망을 갔대요. 남편이 옥희를 찾아 일본을 다 뒤지다가 마침내 남쪽 끝 섬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대요. 섬에 도착하자마자….”

참다 못한 누군가가 말을 자른다. “‘옥희 나와’라고 해서 오키나와가 됐다는 거죠? 팀장님, 재미없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유머를 갖고 다니는 사람은 포기를 모른다. 김 팀장은 유머를 꺼낸다. “제발이란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참, 영국에 “신사라면 우산과 유머를 갖고 다녀야 한다”는 속담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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