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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의 레저 터치] 길 하나에 이름이 여덟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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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 1대 8

강원도 고성에 가면 동해안 따라 그림 같은 트레일이 나 있다. 특히 송지호에서 화진포까지 28㎞ 구간은 유래 깊은 유적지도 여럿이고, 동해안 절경을 끼고 있어 굳이 도보 여행이 아니어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관광명소에 걷기 여행 붐을 타고 트레일이 놓였다. 고성군이 2009년 조성한 ‘관동팔경 800리 길’의 주요 구간으로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구간을 ‘관동팔경 800리 길’이라 부르는 이는 많지 않다. 국토해양부는 ‘관동팔경 녹색경관길’, 행정안전부는 ‘평화누리길’, 국토해양부는 ‘해안누리길’, 문화체육관광부는 ‘해파랑길’이라고 부른다. 강원도청은 ‘강원도 길 낭만가도’와 ‘산소길’이라는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자연경관이 워낙 빼어난 지역이다 보니 부처는 물론이고 지자체도 자기네가 운영하는 트레일의 한 구간으로 지정하면서 생긴 일이다. 최근에는 고성군민이 ‘고성갈래길’을 내면서 송지호∼화진포 구간을 집어넣었다. 그리하여 길 하나에 이름이 8개나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고성군청 직원은 “부처에 신청만 하면 예산이 내려오니 사업 신청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털어놨다.

# 밥그릇 싸움

지난달 2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 길모임 발족식 및 제1회 한국 길 포럼’이 열렸다. 이날 전국의 19개 트레일과 관련 단체가 뭉친 트레일 연합조직 ‘한국 길 모임’이 결성됐다.

  이날 흥미로웠던 건 포럼에서 드러난 부처 간 영역 다툼이었다. 이날 포럼에는 제주올레처럼 트레일 단체는 물론이고 문화체육관광부·환경부·산림청·국립공원관리공단 등 트레일을 운영하는 정부부처도 참석했다. 문화관광부는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와 ‘해파랑길’을 운영하고, 환경부와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북한산둘레길’ ‘한라산둘레길’ 등 국립공원 지역 탐방로 조성사업을 진행하며, 산림청은 ‘지리산둘레길’을 지원하고 있다.

 포럼에서 트레일 단체들은 일제히 정부부처를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예산 중복투입이고, 토목공사 중심이라는 지적이었다. 앞서 사례로 든 강원도 고성과 같은 경우가 전국에 허다했다. 그러나 정부부처는 자기네 사업의 고유성을 굽힐 뜻이 없어 보였다.

  포럼이 끝나고 원혜영 민주당 의원이 도보여행에 관한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트레일 사업을 문화관광부가 주도한다는 내용이 뼈대라고 한다. 적어도 도보여행을 토목사업이 아니라 문화 콘텐트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찬성한다. 반면에 관광상품으로 전락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트레일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문화관광부에 넘길지도 의문이다.

 무릇 밥그릇 싸움은 합의가 불가능한 법이다. 이럴 바에야 별도 기구로 꾸리는 건 어떨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기구라면 적어도 밥그릇 싸움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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