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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 남자, 아내와 점점 뜸해지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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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신문 글씨가 잘 안 보일 때, 턱 밑에 나는 흰 수염을 볼 때,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나를 닮은 ‘늙은이’의 옆얼굴을 볼 때, 회식 자리에서 가장 상석에 앉을 때…. 가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래, 이제 내 나이도 오십이지. 쉼 없이 달려온 남자의 인생이다. 직업에 따라, 삶의 자세에 따라 ‘나이 오십’을 느끼는 중력은 제각각이다. 도전과 새로운 출발을 외치는 사람도 있지만, 50이란 숫자에 ‘공황장애’와 ‘당황’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천명(知天命)’이 주는 공통 분모도 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을 느끼고, 가족을 생각하며, 세계여행과 전원생활을 꿈꾼다. 중앙SUNDAY가 진행한 ‘남자 나이 50’ 설문에선 교수와 국회의원, 고위공직자도 있지만 자영업자, 장의사, 무명화가 등 만화경 같은 50대들의 삶이 서려 있다.

경기도 안양에 사는 조태영(51)씨는 4년차 전업화가다. 그는 매일 집 부근 화실 겸 작업실에 나가 그림을 그리고, 인근 백화점 문화센터 세 곳을 돌아다니며 유화와 누드 크로키를 가르친다. 그는 미대 출신이 아니다. 서울의 한 명문 사립대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다. 1985년, 사회 첫 출발은 식품업계의 대기업이었다. 인정받는 회사 생활이었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대학 시절 서양화 ‘서클’(동아리)에서 잡았던 붓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회사 책상 서랍 한구석엔 늘 유화 붓 세트가 꿈틀대고 있었다. 이후 몇 개의 관련 중소기업을 거치면서 공장장(이사)까지 지냈지만, 그의 삶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2008년 우리 나이로 48세이던 그해 봄,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과감히 사표를 던졌다. 전업화가를 선언했다. 그간 취미생활로 이어온 그림 작업도 있었지만,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가 그의 꿈과 열정을 이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업화가의 삶은 결코 쉽지 않다. 문화센터 한 달 수입은 고작 30만원. 화실에서 회원을 가르치는 것을 합쳐 한 달 수입 100만원이 안 된다. 화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교통비ㆍ점심값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새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내와의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며 “늘 미안하고 때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코 후회하진 않는다. 꿈에 그리던 삶이기도 하거니와 화가로서의 생활에 대한 묘미도 느끼고 있다. 그는 소박하지만 여전히 꿈을 품고 있다. 화단에서 인정받아 그림을 그리면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이 50세 언저리에 시작한 새로운 삶이지만 60세 이후 삶의 질은 어느 누구보다 풍족하리라고 생각한다.

도전과꿈
화가 조씨의 삶엔 50세 남자의 도전과 꿈, 불안이 모두 들어 있다. 지천명 남자의 꿈은 오색 무지개다. 그중 가장 많은 ‘색(色)’은 세계여행이다. 물론 여행이라고 다 같은 여행은 아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이주민), ‘퇴직 5友(건강ㆍ아내ㆍ돈ㆍ취미ㆍ친구)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김철환), ‘지금까지 가족들과 세상을 보면서 여유를 갖지 못했다. 가족과 여행 다니고 싶다’(임재무·조정식·박중욱·양승호·박천일·조정식), ‘배낭여행으로 세계일주’(고진),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며 최고급 와인을 마시고 석양을 즐기고 싶다’(배재규), ‘아내가 원하는 터키 여행을 하고 싶다’(김수곤), ‘내가 지나온 모든 장소를 다시 한 번 방문하고 싶다’(고철현) 등 다양하다. 익명을 요구한 답변자 중에서는 ‘못 가본 곳에 가보고 싶다’‘백두대간 종주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들도 있다.

전원생활(김한영·조정묵·권영진·조태영·안판석) 또는 휴식(김경문)을 누리고 싶다거나, 봉사활동(홍석용·강신우·황성윤·송기동·임봉수·김시곤·김연규)을 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많았다. 이 밖에 ‘책 쓰기’(곽승준·이주철·오대영), ‘악기 배우기’(송기동·이한종·허진호),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서연종),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다’(김형수)는 등의 다양한 꿈이 있었다.
휴식ㆍ여행ㆍ취미가 아니라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더 많은 우승과 역사에 남는 명승부(윤성효), 창의적인 사업 아이템을 찾고 싶다(신철수), 성공한 창업(고인수), 가족 상담사(오영호), 고교 상담교사(김경준), 국가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다(이홍균), 몸짱(김대진), 비영리 소극장 운영(이준경), 스크린 골프장 운영(노재영), 자영업 성공, 실버타운 건설ㆍ운영 등 구체적인 꿈이었다.

걱정과 불안
미래는 여전히 ‘꿈과 도전’이지만 현실에선 50대 이후의 ‘걱정과 불안’도 있다. 기업에 다니는 50세에겐 은퇴가 몇 년 앞으로 다가온 게 현실인 탓이다. 전문직이나 교수 등 안정적이고 정년이 긴 직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십이 되면서 가장 큰 걱정 거리는 뭔가’는 사생활 보호와 솔직한 답을 얻기 위해 익명으로 물었다. 가장 많은 답은 노후와 건강ㆍ자식 걱정이었다
특히 생활 속의 고민이 많이 묻어났다. ‘아직 본격적인 시작도 못한 것 같은데 전반기 인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며 ‘시간이 별로 없다’고 초조해 하기도 했다. 또 ‘아내와 성(性)생활 유지’가 걱정되는가 하면 ‘돌봐야 할 사람들을 오래 돌보지 못하고 먼저 죽지 않을까’ 하며 죽음이 추상적 단어가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데 눈을 뜬 사람도 있다. ‘이뤄놓은 게 별로 없다’거나 ‘내가 안정된 자리에 있어야 딸아이가 좋은 가문으로 시집을 갈 텐데’ 하는 불안감도 눈에 띄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아내의 우울증을 걱정하기도 했다.

아내와의 사이는 ‘오십 남자’의 ‘결혼 적금통장’ 같은 느낌이다. 살아온 삶에 따라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부분 애틋함과 미안함, 연민을 얘기한다. 솔직한 답을 이끌기 위해 역시 익명으로 ‘50세가 되면서 아내와의 사이는 어떤가’라고 물었다.우선 결혼 적금통장을 잘 관리한 경우다. ‘인생의 친구ㆍ동반자ㆍ여동생ㆍ이모 등 다용도 패밀리’ ‘오래된 친구’ ‘여자에서 친구로 변하는 느낌’ ‘둘만의 행복’ ‘서로를 위하는 보이지 않는 배려’ ‘이제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새롭게 연애하는 느낌’ ‘진짜 내 편’ 등의 답변이다. 단둘의 시간이 많아지고, 서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며, 아내를 더 존중하게 됐다는 사람이 많았다.

나의 아내
아내와의 삶이 녹록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섹스가 없어져 간다’고 호소하는가 하면 ‘항상 아이들보다 뒷전으로 취급하니 서운하고 서먹하다’ ‘아픈 데 없이 잘 살고 있어 고맙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하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좋다가 싫다가 밉다가 한다’며 오락가락하거나 ‘뜨겁거나 차가운 시기를 보내고 이제는 미지근한 사이’처럼 적당히 타협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져주고 산다’고 아예 물러서거나 ‘내 복이거니 내 팔자이거니 하며 산다’처럼 달관한 이도 있었다.

또 중앙SUNDAY와 마크로밀 코리아가 50대 남성에게 부부관계의 빈도를 물어본 결과 ‘보름에 한 번’인 사람이 전체의 25.7%로 가장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도 21.3%에 달했다. 하지만 ‘안 한 지 6개월이 넘었다’는 답도 19%나 됐다.‘현재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는 질문도 익명으로 물었다. 가족의 건강, 가족과의 행복 등 표현의 차이는 조금씩 있었지만 ‘가족’이라고 답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음으로 많은 답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거나 ‘입신양명’이라고 말한 경우도 있었다. 교수들은 주로 ‘학문적 성취’를 꼽았다. ‘건강 또는 성(性)생활’이란 답도 있다. 이외에도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들과의 관계ㆍ신의’ ‘바르게 행동하면서 사는 것’ ‘이상과 현실의 조화’등을 꼽기도 했다.

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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