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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안에 갇힌 함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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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정기환
경기·인천취재팀장

1904년 러일전쟁 초기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뤼순(旅順)항에 가둬 두는 작전을 썼다. 고물 기선들에 돌 등을 가득 채운 뒤 자폭시켜 항구 출입구를 막아 버린 것이다. 막강한 전력의 러시아 함대는 항내에 묶인 채 녹슬어 갔고 황해는 일본 해군의 안마당이 됐다.

 일본 육군이 뤼순항의 포대를 점령하면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모조리 수장됐다. 일본 해군은 그 여세를 몰아 이듬해 봄 대한해협에서 러시아 발틱함대까지 궤멸시켰다. 뤼순항 봉쇄작전은 도고의 참모인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미국·스페인 전쟁 때 산티아고항 봉쇄를 관전한 후 제안했다고 한다.

 인천 앞바다를 지키는 인천해역방어사령부(인방사)가 숙원사업인 기지 이전을 놓고 벙어리 냉가슴이다. 특히 제주 강정마을의 한바탕 소동을 지켜본 뒤 마음은 더욱 심란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세기 전의 러시아 함대처럼 인방사도 유사시에 ‘연못 안에 갇힌 함대’가 될까봐서다.

 해상 구간만 12.3㎞인 인천대교는 송도~영종도 간의 인천만을 가로질러 세워졌다. 인천대교가 공격을 받아 무너질 경우 인천항은 완벽하게 봉쇄된다. 폭파된 구조물들은 가라앉는다 해도 거대한 사장교의 케이블들이 얽히고 설켜 뱃길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유사시에 함대가 적을 쫓아 해상 출격도 못해 보고 갇혀 버리는 불길한 시나리오다. 인방사 관계자는 “북한 해군도 이 같은 상황을 잘 알 것”이라며 “도발 억지력이 약화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인방사 이전은 인천대교 사업이 시작된 1990년대 말부터 거론됐다. 국방부는 ‘해상작전에 지장이 된다’며 인천대교 건설에 부정적 의견을 내놓았다. 인천대교 출자자이기도 한 인천시는 인방사를 송도 인근 외항지역으로 이전해 주기로 하고 2005년 7월 착공했다.

 인천대교 개통을 3개월 앞둔 2009년 7월 인천시와 국방부는 2014년까지 인방사를 송도 LNG인수기지 끝단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인천시는 기존 부대 터를 호텔과 수산물유통센터·마리나 시설 등으로 개발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인천시는 이들 사업의 개발이익으로 3000억원 안팎의 이전 비용을 충당한다는 계산이었다.

 각서 체결 후 2년이 넘었지만 이런 계산은 착각이었다. 진척된 게 전혀 없다. 재정난과 부동산 경기 침체 등으로 인천시는 인방사 이전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인천시 측은 “양해각서는 인정하지만 인천시민의 세금으로 부대를 옮겨 줄 수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차일피일하는 사이 주민 반대 등 갈등만 키워 놓았다. 송도 주민들은 “국제도시 인근에 군 부대가 웬 말이냐”며 반대에 나서고 있다. 여기에 시민단체가 가세하고 선거와 맞물리면 영락없는 인천판 강정마을이 될 판이다. 인방사 측은 “정부가 맡든, 인천시가 맡든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지금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안보가 걸린 문제를 서로 거추장스러워하고 떠넘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기환 경기·인천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