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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투자의 선구자 그린 ‘월가의 마녀’로 불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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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22면

캐서린 그레이엄(오른쪽·1917~2001) 전 워싱턴 포스트 회장의 1950년대 사진.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뛰어난 언론인이었던 그레이엄은 포춘 500대 그룹의 CEO에 오른 미국 최초의 여성이었다. [중앙포토]

지난달 23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그룹 여성 임원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성이 임원으로 끝나면 자신의 역량을 다 펼칠 수 없으니 사장까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평소 자전거의 두 바퀴를 예로 들며 여성인력 활용을 강조했다. “다른 나라는 남녀가 합쳐서 뛰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 마치 바퀴 하나는 바람이 빠진 채 자전거 경주를 하는 셈이다. 인적 자원의 국가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비즈니스 세계, 최초의 여성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4월 대기업 임원급 중 여성 비율은 4.7%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국제 비영리기구인 카탈리스트(www.catalyst.org)에 따르면 포춘 1000대 그룹 중 여성 CEO는 34명, 500대 그룹의 여성임원 비율은 15.7%에 그쳤다.

유리천장은 여전히 두껍다. 하지만 과거 수많은 여성의 노력 덕에 이만큼 발전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최초의 여성이 탄생했을 때 진전은 성큼 이뤄졌다. 기업과 금융계 등 비즈니스 세계에서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살펴봤다.

미국 100대 부자 중 여성은 단 한 명
1996년 출판된 100인의 부호:역사상 가장 부유한 미국인에 따르면 역대 최고 부자 미국인은 존 D 록펠러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이 뒤를 이었다. 100명의 부호 가운데 36번째 부자로 단 한 명의 여성이 이름을 올렸다. 헤티 그린(Hetty Green)이다. 19세기 말 대호황 시대가 낳은 최초의 여성 백만장자다. 여성이 유산을 받으면 신탁하거나 남성 친척에게 맡기던 시절, 그는 물려받은 유산을 50여 년간 100배 이상(연 9% 복리 수준의 수익)으로 불렸다.

1834년 포경선 선주의 딸로 태어난 그는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를 위해 6세부터 경제신문을 읽었다. 13세 때엔 가계부를 관리하며 일찍 돈에 눈을 떴다. 21세가 됐을 때 그는 750만 달러를 유산으로 받았다. 현재 가치로 1억700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는 이 돈으로 첫 투자에 나섰다. 미국 정부가 남북전쟁 중 발행한 그린백(Greenback)이었다. 액면가의 40%까지 떨어진 그린백 투자에 모두가 망설일 때 그는 과감하게 가진 돈을 털었다. 1년 만에 125만 달러의 수익이 남았다.

이때 그린은 투자 원칙을 확립하게 된다. 보수적으로 할 것, 만약을 위해 현금을 보유할 것, 냉정할 것. 1905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밝혔다. “나는 값이 떨어져 누구도 원하지 않을 때 산다. 오를 때를 기다려 사람들이 사지 못해 안달일 때 판다.” 그는 항상 넉넉한 유동성을 갖고 패닉이 오기를 기다렸다. 실제 1907년 금융 공황 땐 뉴욕시 관계자들이 부도를 면하기 위해 그린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투자 능력을 가졌고 월가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대했다. J P 모건이 금융공황 대책 논의를 위해 뉴욕증권거래소에 주요 투자자를 소집했을 때 그린은 유일한 여성으로 참석했다.

“여성의 몸에 남성의 뇌를 가졌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남성들을 압도했지만 그는 ‘월가의 마녀’라는 악명을 얻었다. 버는 능력은 탁월했으나 쓸 줄은 몰랐던 탓이기도 했다. 그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지독한 구두쇠였다. 비누를 절약하기 위해 더러워진 옷자락만 세탁하도록 했다. 다리를 다친 아들이 무료 치료를 받도록 자선병원을 찾다가 끝내 아들은 장애를 갖게 됐다. 또 늘 같은 검정 드레스 차림이 마녀를 떠오르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린의 전기를 쓴 찰스 슬랙은 일부 과장됐다고 말한다. 그녀의 능력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더 나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린은 “선구자이며 개척자이고, 스스로의 삶을 선택한 용기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 슬랙의 평가다. 그가 사후에 남긴 현금만 1억 달러, 현재 가치로 약 20억 달러에 이른다.

캐서린 글리슨(Catherine Gleason)은 미국 최초로 주요 전국 은행(National Bank)의 은행장이 된 여성이다. 중앙은행이 생기기 전, 근대 미국에서 연방정부의 인가를 받은 전국 은행은 거점 은행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금융계에서 최초의 역사를 썼지만 그는 엔지니어로 먼저 족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구회사 일을 도왔고 여성 최초로 코넬대 공대 입학 허가를 받았다. 코넬에서 공부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기계 분야에서 남긴 업적은 ‘공구계의 퀴리부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미국 기계공학협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기도 했다.

사업가로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기술 개발만이 아니라 판매에도 직접 나섰다. 직접 유럽 출장도 갔는데, 사실상 미국 제조업이 국제 진출을 시도한 첫 사례로 꼽힌다. 그 덕에 회사(Gleason Works)는 현재 세계적인 공구회사로 성장했다.

글리슨은 1917년부터 19년까지 뉴욕주 로체스터에 있는 전국 은행의 행장으로 재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해 물러난 전임자를 이은 것이었다. 그는 행장으로 재직할 때 건설사를 설립해 중산층을 위한 주택 공급에 나서는 등 대규모 개발 사업을 벌였다. “결혼은 비즈니스를 하는 여성에게 방해가 될 뿐”이라고 말했던 그는 평생 독신이었다.

175년 만에 탄생한 NYSE 여성회원
월가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월가는 지독하게 남녀가 불평등한 곳”이라고 말했다. “전쟁터만큼 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여성 최초로 증권사를 세운 이는 우드헐이었다. 그가 1870년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땐 구경꾼이 몰려들었고, 호기심으로 매매를 의뢰한 고객이 몰려 적잖은 수수료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여성 회원을 받지 않았다. 그는 거래소 밖에서 남성 직원을 시켜 거래를 중개했다. 그의 회사는 3년 만에 파산했다.

약 100년 뒤인 1967년 증권사 브로커로 일하던 35세의 뮤리얼 시버트(Muriel Siebert)는 자신의 이름을 딴 증권사를 세웠다. 그러고는 NYSE에 회원 신청을 했다. 하지만 보증을 부탁한 10명의 남성 중 9명에게 거절당했다. NYSE는 시버트에게 조건을 들이댔다. 44만 5000달러에 이르는 회원권 가격을 충당하기 위한 은행의 대출 약속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은행은 NYSE의 회원 가입 약속이 있어야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버트는 그해 12월 28일 NYSE 최초의 여성 회원이 됐다. 설립 175년 만의 사건이었다.

그는 여성 인권단체를 후원하고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지지하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고위직에 있는 남성들은 여성과 리더십을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화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선 새로운 시각과 경험이 필요하고 더 큰 풀에서 재능을 찾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NYSE 회원 가입 40주년을 맞은 2007년 12월 28일 뉴욕증시 납회를 알리는 종을 쳤다.

여성 최초 대기업 임원은 코카콜라에서 탄생
미국 최초의 대기업 여성 임원은 1934년 코카콜라에서 탄생했다. 르티 페이트 화이트헤드(Lettie Pate Whitehead)였다. 그는 약 20년간 코카콜라의 임원으로 재직했다. 인연은 남편인 조셉 화이트헤드에게서 비롯됐다. 약국을 중심으로 유통되던 콜라를 병입해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이가 조셉이었던 것이다. 그는 코카콜라와 병콜라 판매권 계약을 체결하고 미국 전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함께 사업을 운영하던 르티는 1906년 사업과 부동산을 물려받아 직접 경영했고 코카콜라 이사회에도 참석하게 됐다. “내가 가진 부는 가난하고 불행한 자를 대신해 신탁받은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평생 수많은 단체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그로부터 약 50년 뒤인 1972년 포춘 500대 기업 최초의 여성 CEO가 나왔다. ‘언론계의 여제(女帝)’로 불린 워싱턴 포스트(WP)의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이다.

시카고대를 졸업한 그레이엄은 ‘샌프란시스코 뉴스’라는 작은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금융 재벌이던 아버지 유진 마이어가 1933년 WP를 인수한 뒤 그레이엄을 신문사로 보낸 것이었다. WP에는 1939년 입사했다. 그는 1940년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결혼했다. 유진 마이어는 46년 최대주주 자리를 사위인 필립 그레이엄에게 물려줬다. “남편(필립 그레이엄)이 아내가 주인으로 있는 회사를 위해 일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필립 그레이엄이 63년 우울증으로 권총 자살하면서 캐서린 그레이엄은 신문사 경영을 맡았고 73년 회장으로 취임했다. 뚝심과 추진력으로 회사를 미국 굴지의 미디어 기업으로 키웠다. 하지만 그도 고위직 여성의 롤모델이 없어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고 회고록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자신감과 지식이 늘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최초의 대기업 여성 CEO가 된 것은 WP 내에서의 남녀평등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사회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캐서린 그레이엄 이후 또 다른 포춘 500대 기업 여성 CEO가 나오기까진 13년이 걸렸다. 86년 CEO에 취임한 의류업체 와나코(Warnaco)의 린다 와크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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