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감성 슬로건, 그 솔깃한 유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

인류사 최악의 인물 중 하나인 아돌프 히틀러는 선출된 권력이었다. 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지 않은 ‘정치인’이다. 독일인들이 역사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런 흉악한 인물을 옹립하고 함께 광분하여 세계사를 망가뜨리는 데 기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인들은 세기가 넘어가도 여전히 반성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는다. 그런 히틀러와 관련한 정치현상들이야말로 이른바 포퓰리즘의 가장 극악한 형태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정치에서 하나의 비판적 도구로 사용되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이젠 그 이름 그대로 대중화되어 주민투표 선전 현수막에도 등장했다. 꽤 어려운 듯한 학술적 개념이 현실정치의 한복판으로 냉큼 뛰어든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상당히 현학적인 수준에 다다랐다고나 할까.

 그러나 정치대중의 취약한 측면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단어가 과연 현실정치의 슬로건에 직접적으로 등장할 만한 것인지, 조금 묘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누구도 아닌 투표권자들 자신이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아닌가 말이다. 3년 전 총선 때 나타났던 현상을 ‘뉴타운 포퓰리즘’이라 칭하며 서울의 유권자들을 꾸짖어야 했던가.

 흔히 실력이 일천한 초급 학자들이 개념의 덫에 빠지고, 간편한 대중선동에 맛들인 정치가들이 낙인찍기에 몰두한다. 지난번 주민투표 때 여당은 야당의 ‘나쁜 투표’라는 감성적인 슬로건을 비난했지만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슬로건 역시 현학적이면서 동시에 감성적인 차원에 있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 ‘포퓰리즘’은 아마도 ‘나쁜 수작’이나 ‘사기(詐欺) 질’ 정도의 의미를 크게 넘어서지 못할 테니 말이다. 어려운 학술·역사적 개념이 간단한 낙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는 본시 중우(衆愚) 정치라는 함정에 빠질 가능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탈에 빠지지 않도록 대처하는 능력이 그 사회의 역량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설사 중우정치의 위험성이 있다 하더라도 21세기에 플라톤식 철인정치를 주장하고 나설 수는 없지 않은가.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어두운 이면인데 그 어두운 면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때 자칫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와 비난으로 흐를 염려가 있다. 그렇지 않아도 군사독재를 그리워하는 탄식을 이따금씩 듣는 것만으로도 걱정스러운 형편인데.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전문가와 학자들의 몫을 너무 쉽게 빼앗고 뭉개버리거나 외면하는 현상이 일반화된 듯싶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도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건설 문제에 대해서는 그 역시 전문가이며 학자인 문정인 교수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 해군기지의 설치가 노무현 정권 때 결정된 안이며 세계열강의 패권 다툼 속에 우리나라의 자주국방을 위한 것이라는 문 교수의 설득에 이견을 달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오로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은 감내하기엔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이미 지난 일이지만 고속철과 천성산 도롱뇽의 갈등 속에서 전문가들의 입지는 누락된 것처럼 보였다. 지율 스님이 환경전문가는 아닐 텐데 어찌해서 그토록 일이 힘들게 꼬였었는지 다시 한 번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4대 강 사업에서는 과연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했는가.

 문제는 합리적 전문성이 외면되거나 스스로 돌아앉고 애오라지 정치적 분열만이 극단으로 치닫는 곳이 한국사회라는 점이다. 사안별로 합당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다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어느 편인지가 오로지 문제될 뿐이다. 너나없이 파당적 이익에 매달려 사실 왜곡과 정치공학에만 골몰할 때, 과연 미래의 대한민국 사회가 어떤 모양이 될지 무척 걱정스러운 것이다.

정재숙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