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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실망스러운 박근혜의 F·A 기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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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미국의 대외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교평의회가 발간하는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는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포린 어페어스는 1947년에는 조지 케넌이 ‘미스터 X’라는 가명으로 냉전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근간이 된 대(對)소련 봉쇄론을 편 논문을, 1993년에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전 세계의 수많은 지도자와 학자와 외교정책 수립가들이 포린 어페어스 지면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그때마다의 세계적인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내고, 장기적으로는 20세기 또는 21세기의 세계가 지향하는 미래상을 제시했다. 포린 어페어스는 국제정치와 외교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필독지라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 포린 어페어스에 글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통찰이 세계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2012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의 지위를 지키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포린 어페어스 9/10월호에 쓴 대북정책에 관한 글은 당연히 주목을 끌었다. 북한 내부사정이 복잡하고, 6자회담에서 핵 문제가 해결될 전망이 안갯속이고, 천안함·연평도 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 2013년에는 한국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정치인의 북한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의 비전은 지금부터 내년 대선기간 내내 가장 중요한 화두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문제의 글을 읽고는 맥이 탁 풀렸다. 쓰고 싶어도 아무나 쓸 수 없는 포린 어페어스에 기고할 기회를 잡은 한국의 ‘미래의 권력’이 어떻게 이런 함량 미달의, 속이 빈,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한 걸음도 나아간 것이 없는 글을 쓴 것인지 모르겠다.

 박 전 대표는 핵과 남북관계 교착의 원인을 신뢰의 부재에 있다고 보고 해결책으로 신뢰의 정책(Trustpolitik)을 제안했다. 첫째, 북한은 최소한의 신뢰를 쌓기 위해 남한 및 국제사회와 체결한 합의를 지키고, 둘째 북한이 평화를 교란하는 도발행동을 하면 거기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뢰의 정책이라는 고상한 말을 쓰지 않아도 북한은 합의를 이행해야 하고 도발행위에 대해서는 응분의 대가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한국과 미국이 확고하게 지키는 입장 아니던가. 그걸 새삼스럽게 신뢰정책의 이름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지에 소개한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신뢰구축에 필요한 새 정책이라면서 연계(Alignment)정책을 주장했다. 한국의 안보를 남북대화·협력 및 국제적인 노력에 연계한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연계정책이란 북한에 대해 어떤 때는 강경노선을 취하고 어떤 때는 협상을 하는 유연한 정책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남북 간에 평화체제가 만들어지지 않고 한국이 안보를 한·미동맹에만 의존하는 지금의 체제가 정상이 아님은 상식이다. 남북화해 없이 한국의 진정한 안보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퍼주기’까지 했다. 그래도 평화는 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3대세습 같은 북한 내부사정이다. 박 전 대표는 한국과 국제사회는 핵을 포기하는 것이 북한이 더 안전하고 풍요롭게 사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말은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이지 박 전 대표의 새로운 통찰이 아니다. 대세론을 믿는 한국의 ‘미래의 권력’은 남북관계의 타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도, 깊은 통찰도 없는 글을 위한 글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포린 어페어스 글은 그의 2009년 스탠퍼드대학 연설에도 못 미친다. 스탠퍼드대학에서 그는 북핵 문제는 그것만 따로 떼어서는 해결할 수가 없고 북한 문제, 더 크게는 동북아 다자안보 프로세스의 틀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옳은 말이다.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라는 분모를 키워 북핵이라는 분자를 최소화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박 전 대표의 대북정책 선언은 스탠퍼드대학 연설을 구체화하고 진일보시킨 것이라야 했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노선을 계승하는 것은 상상력 부족의 산물이고 시대의 요청에 역행하는 무책임한 정책이다. 포린 어페어스 글의 수준으로는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 수 없다. 박 전 대표는 스탠퍼드대학 연설로 돌아가서 남북 문제를 더 많이 고민할 것을 권한다. 그렇게 얻은 큰 비전의 그릇에 깊은 통찰과 현실적인 정책을 담은 글과 말을 기대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