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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신용중시한 송상의 후예, 한창수 회장

중앙일보

입력

흰 양복과 빨간 와이셔츠, 흰 나비넥타이 차림에 쾌활한 웃음을 짓는 백발 노인의 사진, 그리고 그 옆에 놓여진 희고 검은 중절모 두개.
지난 20일 별세한 개성상회 2대 회장 한창수(韓昌洙.81)씨의 빈소에 올려진 영정과 유품이다.

60여년간 인삼판매 사업을 하면서 고인이 걸어온 독특한 인생 행로를 보여주는 물건들이다.

1919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 '송상(松商.개성 상인)' 의 관습대로 다른 상점에서 무급 점원으로 3년간 일한 후 19세 때 아버지 광석(光錫.75년 작고)씨가 서울 을지로 네거리에 차린 개성상회에 들어갔다.

52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이어받은 韓회장은 '철저한 신용 확보' 라는 부친의 사업 철학을 그대로 지켜 개성상회를 번창시켰다.

현재 을지로 두산빌딩 자리인 당시 개성상회 지하 바는 50년대 우리나라 상류사회의 사교장이었다.

유진오(兪鎭午).이동원(李東元).이익흥(李益興.전 내무장관)등 정.관계 거물들과 이정림(李庭林.전 대한유화회장).이회림(李會林.동양화학 명예회장).장상태(張相泰.전 동국제강 회장)씨 등 많은 기업인들이 이곳에 와 담소를 나누었다.
장남 상화(相和)씨는 "매일 식사 때가 되면 수십명이 찾아와 마치 잔칫집 같았다" 고 회고했다.

韓회장의 사업은 6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게 주된 이유지만 여기에는 또다른 배경이 있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 야당 정치인들과의 각별한 교분이 그것이다.

고인은 자유당 시대부터 쌓아온 정치인들과의 정분을 어떤 상황에서도 외면하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 초기와 70년대 유신 시절의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어려운 야당 인사들에게 양식과 돈을 대줬다.
이처럼 '재산은 잃어도 신의는 저버릴 수 없다' 는 송상의 가르침에는 충실했지만, 이는 사업에 독(毒)으로 작용했다.

새 사업권을 따내는 것은 고사하고 끊임없는 세무사찰에 시달렸다.
을지로 입구에 있는 세채의 회사 건물도 도로확장이라는 이유로 차례로 헐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정권의 압력을 받으며 韓회장의 관심도 사업에서 점점 멀어졌다.

대신 '미범생(美凡生)' 이라는 좌우명을 내세운 후 여기에 맞게 멋지고 평범한 삶을 사는데 주력했다.
중절모.나비 넥타이.흰구두 차림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보신탕을 유별나게 즐겼고, 중절모를 5백여개나 수집했다.
보디빌딩에도 심취, 80세에도 선수 못지 않은 단단한 몸매를 유지했다.

YS와의 보신탕 식사자리에서 보신탕과 연관된 섹스 농담을 한 유일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韓회장이 별세한 날 빈소를 찾은 YS도 "나의 말을 어려워 하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YS가 대통령이 된 후에는 "보상을 바라고 도와준 게 아니다" 라며 철저히 근신했다.
한 예로 파리대학 박사인 딸 상인(相仁)씨를 요직에 기용하겠다는 YS의 제의를 거절했다.

송상의 후예로 한 시대를 풍미한 로맨티스트, 그것이 바로 인간 한창수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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