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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94) 신상옥 감독과 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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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나나 신상옥 감독이나 영화에 미친 사람이었다. ‘영화’라는 공통분모 아래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게 없었다.

 1967년 ‘내시’ 스케줄 문제로 신필름 직원을 폭행해 고소를 당했지만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1주일 약식기소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지만 신필름의 직원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액땜을 한 것일까. ‘내시’는 크게 성공했다. 68년 최고 흥행작 중 하나였다. 애인(윤정희)이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에 들어가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내시로 위장하는 남자(신성일)의 이야기다. ‘내시’는 노출 시비에 휘말리며 검찰에 고소당했다. 왕(남궁원)에게 몸을 앗기는 장면에서 윤정희가 웃통을 벗은 뒷모습이 문제가 됐다. 신 감독은 피고인 조사를 받고, 나와 윤정희·남궁원 주연배우 셋은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법정에 섰을 때 윤정희와 남궁원은 보이지 않고, 신 감독만 나와 있었다. 판사가 물었다.

 “배우는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다 따릅니까?”

 주연배우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영화배우도 창의성을 갖고 성격을 만듭니다. 감독의 말 대로 따라 하는 것은 주연배우의 모습이 아닙니다.”

 판사는 나머지 증인 두 사람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들을 다시 불러 증인 청취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가 망치를 내리치려는 순간, 신 감독이 제동을 걸었다.

 “재판장님, 신성일은 굉장히 바쁜 배우입니다. 다른 두 배우도 같은 대답일 텐데, 증인 채택은 신성일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증인 심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소”라면서 망치를 두들겼다. 복도로 걸어 나오는데 기분이 좋았다. 신 감독과 배짱이 맞았기 때문이다. 신 감독이 말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홍보가 된 셈이다. 우리 ‘내시’ 속편 만드는 게 어때?”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속(續) 내시’를 만들기로 했다. 다음 해 신 감독과 나·문희가 뭉쳐 ‘속 내시’도 성공시켰다.

신성일·윤정희 주연의 영화 ‘내시’(1968). 궁에 들어간 애인을 구하기 위해 내시로 위장했던 사내가 정체가 탄로난 뒤 문초를 받는 장면이다. 흥행에 성공해 속편도 만들었다.

 ‘내시’는 신필름의 사세를 일으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당시 영화제작사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극장 수에 비해 영화제작사가 너무 많았던 것. 상영을 기다리는 작품이 줄 서 있었다. 때문에 극장의 횡포가 엄청났다. ‘하루 관객 1000~1500명이 들지 않으면 다음 작품 예고를 내보내겠다’는 계약조항도 강요했다. 커트라인에 걸리면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교체해 버렸다. 수익 정산 때 극장 화장실 청소비까지 제작자에 떠넘길 정도였다. 세기상사처럼 극장을 소유한 제작사들은 버틸 수 있었다. 한국영화 제작은 수입 쿼터를 받는 방편이었고, 수입 쿼터를 받은 제작사들은 외화로 돈벌이 하는 데 혈안이 됐다.

 ‘춘몽’(65)과 ‘내시’, 60년대 외설 및 노출 시비에 걸린 두 작품에서 내가 주인공을 했다는 사실도 이채롭다. 검찰은 사회규범에 비추어 고소를 했지만, 사실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들이었다. 어찌됐든 ‘내시’로 신 감독과 나 사이에 흐르던 아쉬운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작품을 함께하면 다 끝난 것이다. 우린 그런 사내들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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