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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토마스 앤더슨, 그들만의 가족, 미완의 가장(家長)

중앙일보

입력

폴 토마스 앤더슨(1970-)을 두고 '제2의 쿠엔틴 타란티노' 운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표현인 것 같다. 이를테면 이들 사이의 공통점이란, 둘 다 선댄스 영화제에 의해 '발견된' 신예 영화감독(이른바 '선댄스 키드'라 불리는)이고 비디오 숍에서 영화를 깨우친 세대이며 앞 세대와는 달리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자들이라는 몇 가지 사실들에서 볼 수 있듯이 다소 '피상적인' 것들이다.

반면 정작 보다 중요한 이 둘의 영화 세계는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한다고 보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분명 타란티노나 앤더슨이나 공히 활력 넘치는 유희의 정신으로 기존의 텍스트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자기의 캔버스 위에 부활시켜 놓는 '인용의 영화'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동류(同類)의 영화를 만들진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타란티노가 폭력과 피와 욕설로 범벅된 스크린으로 세상을 철저히 조롱하면서 쾌락을 찾는 가벼운 위악(僞惡)주의의 미학을 설파한다면, 앤더슨은 그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는 자족적인 스크린 세계를 그냥 팽개치지 않고 대신 온기 있는 손길로 한 번 어루만져 보려 한다(그런 '성숙함'이 완전히 체화되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앤더슨에게는 마구 펼쳐놓은 듯 보이는 픽션의 세계를 추스르고자 하는 성숙함이 있다. 그렇다면 '제2의 타란티노'라는 별칭은 앤더슨이 타란티노처럼 젊은 나이에 90년대 미국 영화계의 문제적 총아로 떠오른 인물임을 가리키는, 제한된 의미의 그것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것이다.

1970년 캘리포니아의 스튜디오 시티에서 태어난 앤더슨의 개인적인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언제나 영화 감독이 되기를 바랐던 그는 에머슨 칼리지 영문과를 1년 다닌 후 중퇴하고 뉴욕대 영화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제도 교육이란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단 이틀 만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앤더슨이 필요로 한 유일한 교육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고 그리고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에게 기회의 문을 열린 것은 93년 선댄스 영화제 단편 프로그램에서 단편 〈담배와 커피 (Cigarettes & Coffee)〉가 선보이면서 였다. 이 작품에 대한 호평은 앤더슨이 첫 번째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인데, 선댄스 재단으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고 제작된 그의 데뷔작이 바로 〈하드 에이트(Hard Eight )〉(국내 비디오 출시 제목은 〈리노의 도박사〉)이다.

〈하드 에이트〉는 굳이 구분을 하자면 느와르 영화에 속한다. 하지만 이 영화엔 암흑가의 조직이 등장하지 않으며, 조직내의, 그리고 조직 사이의 암투와 살육전은 더더욱 찾아 볼 수 없다. 그 대신 〈하드 에이트〉는 자신의 죄를 씻으려 투쟁하는 한 도박사의 힘겨운 노력을 어떤 수사적 장치들을 배제한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처럼 상업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영화가 관객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일이지만 영화는 그 비극을 비평 진영으로부터 받은 찬사로 대갚음했다. 예컨대 〈하드 에이트〉는 "〈펄프 픽션〉이래 가장 매혹적인 네오 느와르(neo-noir)"라는 상찬을 들었는데, 그런 호평을 기화로 앤더슨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인 〈부기 나이트〉를 만들 수 있었다.

〈부기 나이트〉는 실제로 1970년대 후반에 인기를 모았던 포르노 배우인 존 C. 홈즈를 모델로 삼아 만든 영화로 그 주인공의 성공과 쇠락 과정을 통해 포르노 산업의 이면을 들추어 본다. 〈부기 나이트〉는 섹스 산업이라는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영화이고 또한 포르노라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역겨운'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강렬한 노스탤지어의 눈길을 보내는 영화다. 영화는 일종의 폐쇄적인 이 공동체에 속한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시끌벅적하고 소란스러움이 느껴지는 산만한 내러티브 구조와 화려한 스타일 속에 담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에로틱한 분방함의 요체일 지도 모른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매그놀리아〉는 이 두 작품에 이은 앤더슨의 최근작인데, 얼핏 보면 아주 달라보일 수도 있는 이 세 영화들을 관통하는 고리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유사)가족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하드 에이트〉가 구속(救贖)의 과정으로서 가족을 만들려고 고투하는 한 인물에 대한 영화라면, 〈부기 나이트〉는 외부와 단절될 수밖에 없기에 자신들만의 닫힌 '유사 가족'을 형성한 사람들에 대한 영화이다. 한편 〈매그놀리아〉는 이 작품들보다 더 뚜렷하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확인되는데, 이 신작에서 이리저리 엮인 다수의 인물들이 무엇보다도 가족의 굴레로 인해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은 명백한 편이다.

매번 이런 공통의 주제와 동일한 배우들(필립 베이커 홀, 존 C. 라일리, 필립 시모어 호프만, 줄리안 무어, 윌리엄 H. 메이시 등 앤더슨의 영화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배우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가족'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을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의 영화들이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건 그 영화들이 채택한 형식미와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건 이 시네필리아의 영화들이 주로 기대고 있는 주요 '레퍼런스'(references)가 서로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의 영화 경력은 장 피에르 멜빌의 냉정함의 미학(〈하드 에이트〉)에서 마틴 스콜세지의 활력에 가득찬 스타일(〈부기 나이트〉)로, 그리고 로버트 알트만의 파편적인 이야기 구조(〈매그놀리아〉)로 이어져 온 것이다. 앤더슨의 영화들은 그가 이 선배들의 미학을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들이기도 하다.

〈매그놀리아〉는 앤더슨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세인들에게 잘 알려준 계기가 되는 작품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지만 사실 이전의 두 작품들에 비하면 강렬함의 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그것은 팽팽한 긴장감과 느슨한 이완의 감정을 정밀하게 조절하는 힘이 부치기 때문이 아니라, 인생과 우연과 같은 문제를 꽤 농밀하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사유의 완력이 약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른스러워지려고 하지만 아직 심도가 깊지는 않은 성찰, 그러나 그것을 풀어내는 매혹적인 스타일. 폴 토마스 앤더슨이 최근 미국 영화계에서 등장한 최고의 유망주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완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작품 목록

- 96년 〈하드 에이트 Hard Eight〉
(비디오 출시 제목은 〈리노의 도박사〉)
- 97년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비디오 출시)
- 99년 〈매그놀리아 Magnolia〉 (현재 극장 개봉중)

※홍성남씨는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중앙대 영화학과(석사과정)졸업, 현재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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