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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환영의 시시각각

‘판도라 상자’ 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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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

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는 국민이 길거리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는 ‘길거리 민주주의’다. 사회적 항의는 이미 민주화된 나라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는 중산층이 시위에 나서 물가고에 항의하고 복지의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칠레에서는 공교육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위에 일반 시민이 가세했다.

 정치 엘리트와 국민 사이에 간극이 생기면 국민이 뽑은 대표자들이 담당하는 대의제 민주주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라는 안전판·배출구가 필요하게 된다. 주민·국민투표, 국민발안(國民發案·initiative), 소환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장치들은 국민·유권자가 길거리 민주주의에 나설 필요가 없게 해준다.

 직접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국가의 의사 결정과 집행에 참여하는 정치제도다. 직접민주주의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극치요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직접민주주의로 국민이 입법자가 될 수 있다.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한다. 이 두 민주제도는 사이 좋게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다.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민주주의의 다음 단계로도 볼 수 있다.

 지금 기술로도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 전자민주주의의 귀착점은 직접민주주의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모든 민주국가들이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하고 강화해왔다. 그러나 직접민주주의가 가까운 장래에 간접민주주의를 대체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가능성을 낮추는 역사적·사상적 배경이 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미국 정치를 설계할 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최대한 배제했다. 그들은 직접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며 소수를 보호하는 데도 취약하다고 봤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의구심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알게 모르게 직접민주주의를 제한한다.

 직접민주주의 구현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전문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책 결정은 일반 유권자가 파악하기 힘든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요구한다.

 무료급식에 대한 서울 시민의 뜻을 묻는 주민투표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인 직접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스위스 국민은 일년에 30여 회에 달하는 주민·국민투표에 참가해야 한다. 투표에 제대로 참가하려면 국민이 부지런히 국정 사안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자금 문제도 직접민주주의가 풀어야 할 숙제다. 직접민주주의를 풀뿌리 민주주의의 대명사처럼 내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돈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게 중론이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성숙해야 그 다음 단계인 직접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직접민주주의는 협상과 타협의 정치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가 성공적인 이유는 주민 발안자와 당국이 활발한 협상을 벌이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를 꽃피우게 하려면 정파들이 대결적 정치 환경을 극복하고 최대한의 합의(consensus)를 도출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 직접민주주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한다. 직접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 잘못된 만남을 갖는 경우다. 예컨대 보다 나은 학교, 병원 신축 등을 꾀한 캘리포니아의 주민 발안은 주정부를 파산으로 이끈 원인으로 지목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와, 직접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각각 친하다.

 이번 주민투표로 직접민주주의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는지 모른다. 선거 결과에 대한 단기적인 갑론을박보다 중요한 건 직접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도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국제·지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