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우암·다산 귀양 살던 오지로 초대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 회원들이 정약용이 유배 시절 들렀다는 신창리 해변을 답사하고 있다. 다산은 이곳에서 해녀의 힘든 삶을 직접 목도했다. [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 제공]


“강진·제주만 유배지가 아닙니다. 포항도 귀양지였습니다. 이곳 장기현은 조선시대 모두 106명이 유배를 왔습니다.” 섭씨 30도를 훌쩍 뛰어넘은 13일 경북 포항시 장기면 장기초등학교 교정. 지역 문화해설사로 활동하는 금낙두(72) 장기발전연구회 이사는 운동장 한 편에 서 있는 사적비 앞에서 유배지 장기의 내력을 설명했다. 국학연구소 대구경북지부가 마련한 이날 나라배움 답사에는 회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주제는 ‘조선시대의 형벌과 유배생활’.

 장기현은 포항시의 남단인 장기면 일대다. 지금도 포항에서 교통이 가장 불편한 지역으로 남은 곳이다.

정약용을 기려 주민들이 세운 사적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해 있다.

 사적비의 주인공은 우암 송시열(1607∼1689)과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우암은 1675년부터 4년여 장기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그가 당시 심은 은행나무는 지금도 교정에 서 있다. 유배 기간 우암은 학문을 전수하는 등 주민들과 교분을 나눈 것으로 전해진다. 제자도 생겼다. 우암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관계는 이어졌다. 장기현에는 이후 우암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들어섰다. 장기 사람들은 그래서 우암을 벽지에 학문을 전한 은인으로 받아들인다. 2001년 주민들이 사적비를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우암이 떠나고 120여 년 뒤인 1801년에는 다산이 이곳으로 귀양 왔다. 정조의 승하로 남인 정권이 몰락한 직후였다. 다산의 장기현 유배는 7개월 10일 동안이다. 그도 짧은 기간 학문을 가르쳤다. 다산은 이곳에서 130여 수의 시를 남기고 『촌병혹치』 등 3권의 책을 저술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우암의 사적비 옆에는 그래서 다산의 사적비도 세워졌다.

 금낙두 이사는 “주민들은 두 선생이 다녀간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앞으로 이곳에 유배 체험장 등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장기면은 지금도 인물이 많다. 박명재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이곳 출신이고 광복 이후 고시 합격자만 19명이 나왔다.

 안동대 정진영(57·사학) 교수는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조선시대 유배에 관한 특강을 했다. 다산은 유배 동안 빈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지네를 보고 기겁하기도 했다. 또 해녀가 자맥질하다가 졸지에 시체로 떠오르는 참혹한 삶과 솔피(범고래)들이 고래를 공격해 피바다가 되는 형상도 목도했다. 정 교수는 “유배는 서울과 벽지의 학문 격차를 줄이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송의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