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섬>의 여주인공 서정 - 슬프거나 혹은 격하거나

중앙일보

입력

오래 전(그래봐야 몇 해 전이지만) 이지상 감독의 16mm 장편 영화 <둘 하나 섹스> 촬영 쫑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고 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조용히 술만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길을 끄는 여자가 있었지만 차마 말은 못 걸고 흘낏 눈인사만 나눈 후 집으로 돌아왔다. 한참 지난 후에 그녀가 <둘 하나 섹스>의 여주인공, 서정이란 걸 알았다.

아직 <둘 하나 섹스>는 등급보류라는, 또 다른 검열에 묶여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제를 제외하곤 일반관객들이 <둘 하나 섹스>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다. 만약 볼 기회가 된다면 극중 여주인공 서정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서정은 최근 개봉 예정인 김기덕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섬>에서 생애 첫 주연을 맡았다. 이미 <박하사탕>의 '미스 리'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관객들에게 서정이란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그녀는 독립영화계에선 이미 스타로 대접받고 있는 인물이다.

세간에 장선우 감독의<거짓말>보다 더 야하다고(?) 소문난 <둘 하나 섹스>에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으며 <아쿠아 레퀴엠>, 9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느린 여름>과 함께 선재상을 받은 임창재 감독의 실험영화 <눈물>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특별히 연기를 전공하거나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다. 듣자하니 대학도 나오지 않았으며(대학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마는...) 몇 년간을 자폐증 환자처럼 살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교통사고의 후유증이 아물 무렵 이지상 감독의 <탈-순정시대>의 시나리오를 접했단다. 그리고 1주일간 강원도 인제와 원통에서 첫 연기경험을 했다. 이를 통해 서정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연기에 대한 열망을 깨달았다.

<둘 하나 섹스>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장면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시나리오와 이지상 감독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독립영화들이 그렇듯 열정 하나만으로 어렵게 어렵게 <둘 하나 섹스>는 완성됐지만 이게 웬걸? 등급을 빙자한 검열 덕분에 영화는 마냥 창고에 썩는 신세가 됐다.(현재 <둘 하나 섹스> 제작사는 등급보류에 대한 행정소송을 법원에 제기한 상태다)

서정이 처음 선보인 상업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설경구와 밀애를 나누는 가구점 여종업원 '미스 리' 역할을 맡았다. 비록 그리 크지 않은 배역이었지만 서정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박하사탕> 이후 선택한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신작 <섬>. <섬>은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화로 <악어>, <야생동물보호구역>, <파란대문>에서 보여줬던 밑바닥 인생을 통해 인간 내면에 내재돼 있는 파괴적인 모습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서정은 낮에는 밥을 팔고, 밤에는 몸을 팔며 섹스를 통해 타인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야생적인(?) 캐릭터(희진)로 등장한다. 대사는 거의 없지만 표정과 몸짓만으로 이 역을 훌륭히 소화해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촬영에 들어간 <섬>은 한달 반동안 촬영지인 경기도 안성 고삼 저수지에서 매일 촬영을 했다. 촬영 후 6㎏ 정도 살이 빠졌지만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대사 한마디 없이 눈빛과 몸짓으로만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이 더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서정은 올해 한국영화가 가장 주목하는 배우가 됐다.

<섬>에서 서정은 그녀는 <박하사탕>과는 다른 야누스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 <박하사탕>의 청순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도발적인 이미지로 변신한 것이다.(왜 위험한지는 영화 <섬>을 직접 보면 안다) 이는 기존 여배우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청순함'이나 '고고함'과는 한참 멀다. 그런 면에서 서정이란 배우의 이미지는 매우 독특하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답지만 위험한 그녀. 서정이 스타로 남을지 연기자로 남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제까지 그녀가 선택한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후자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이제 서정은 새로운 출발점에 선 셈이다. 그녀가 타성에 젖지 않고 자신만의 이미지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10년 후 근사한 배우 서정을 다시 만나길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 필자 조은성씨는 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의 조감독을 거쳐 EBS 교육방송 〈시네마 천국〉구성작가, 나우누리 영화동호회 시삽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인터넷 업체(아이팝콘)에서 영화컨텐츠팀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