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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왕국인 미국 ‘디지털 격차’ 해소에 진땀

중앙일보

입력

인터넷이 가장 잘 발달했다는 미국에서 인터넷이 새로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사상 최장의 호황을 구가할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꼽히는 인터넷이 무슨 문제가 될까 싶지만 실은 인터넷이 발달하면 할수록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내연하고 있다는 게 미국 식자층의 우려다. 그것은 바로 ‘디지털 격차''다.

지난 20세기에 미국이 사회적으로 가장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는 인종간·계층간 ‘소득 격차’였다. 그러나 인터넷과 컴퓨터가 가져다준 ‘뉴 이코노미’는 그동안 누적됐던 빈부격차의 문제를 상당부분 희석시켰다. 실업률은 30년만에 최저 수준이고, 기업들은 일손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 홀대받았던 흑인과 소수인종의 취업률이 사상 최고수준으로 높아졌고, 논란이 됐던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에 대한 이민 규제도 관대해졌다.

뉴 이코노미가 이룩한 거대한 富의 수액(樹液)이 흘러넘쳐 이제 저소득층과 소수인종들도 풍요로운 호황의 단맛을 즐기기 시작했다. 주말마다 대형소매점에 몰려든 미국인들의 소비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21세기를 최고의 호황속에 맞이 한 미국에서 빈부격차는 더이상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같은 호황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심각한 계층간 균열이 드러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대중화가 불러온 정보화·지식 사회의 물결속에서 앞서 나가는 사람과 뒤처진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초 한창 대통령 예비선거 유세를 벌이던 앨 고어 부통령은 인터넷과 컴퓨터의 본고장 실리콘 밸리에서 ‘디지털 격차’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앞으로는 단순히 (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보다는 ‘정보를 가진 자’와 ‘정보에서 소외된 자’간의 격차가 더 심각한 사회적 불안요인이 될 것이란 얘기다.

인종간 갈등과 소득격차 해소에 앞장서 온 제시 잭슨 목사는 캘리포니아大(버클리 캠퍼스)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이를 더욱 극명하게 표현했다. 그는 “(정보화·지식사회에서)정보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야 말로 민권투쟁의 새로운 과제”라고 선언했다.

앞으로 정보기술(IT)에서 뒤처질 경우 단순히 돈을 더 벌 기회를 놓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지키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현실인식이다. 즉 인터넷을 사용할 줄 모르면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미국에선 사회의 많은 부분이 인터넷으로 대체되고 인터넷을 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숙제를 이메일로 내고 이메일로 받는 대학강좌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추세는 중·고등학교로 확산되고 있다. 대형식품·가정용품 체인점인 세이프웨이는 모든 납품절차를 인터넷을 통해 처리한다. 은행거래와 세금납부가 인터넷으로 가능해지고, 자동차 등록과 폐차도 인터넷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마당에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은 학업이나 사업은 물론 일상생활에서조차 심각한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격차는 또 단순히 인터넷을 알고 모르는 것과는 다른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인터넷을 ‘안다는 것’과 ‘실제로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인터넷망에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가 있어야 한다. 즉 사용가능한 컴퓨터가 없거나 있더라도 컴퓨터가 외부의 인터넷망에 접속되지 않고는 의미가 없다.

문제는 여기에 큰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간의 ‘디지털 격차’는 장래에 회복할 수 없는 ‘학력 격차’와 ‘기술 격차’,‘문화 격차’로 확대되고 결국은 심각한 ‘계층간 격차’로 귀결된다.

또 한가지는 접속 속도의 격차다. 똑같은 컴퓨터를 가졌더라도 전화모뎀을 사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경우와 초고속통신망이나 케이블회선을 통해 접속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낡은 전화선으로는 초고속통신망이나 케이블이 제공하는 신속하고 풍부한 음성정보와 동화상을 얻을 수 없다.결국 접속방법의 차이는 정보의 量과 質의 격차를 낳는다.

미국에서는 이같은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우선 성인들의 디지털 격차는 제쳐두고라도 자라나는 어린이들 만큼은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는 일이 없도록 모든 학교에 컴퓨터와 인터넷을 보급하는 사업이 국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여기에는 컴팩이나 델컴퓨터 같은 컴퓨터회사와 마이크로소프트 등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각급 학교에 초고속통신망을 깔아주는 사업은 빌 클린턴 정부가 제시한 임기말의 최우선 과제다. 디지털 격차는 한국에서도 조만간 소득 격차나 학력 격차, 지역 격차를 능가하는 근본적이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의 보급속도와 열기만큼은 세계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같은 ‘디지털 격차’ 해소에 어느 정도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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