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1조2700억 매물 폭탄 … 강남 아줌마들 받아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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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피 지수가 10일 소폭(4.89포인트) 오르며 7거래일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개인 투자자들이 사상 최대의 매수에 나섰다. 원화 가치도 달러당 8.10원 오른 1080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날 오후 서울 명동의 외환은행 딜링룸에서 한 딜러가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개인과 외국인 투자자 간 사상 최대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10일 서울 주식시장에서다. 기싸움은 초반부터 치열했다. 오전 9시 개장과 동시에 개인은 ‘사자’를, 외국인은 ‘팔자’를 쏟아냈다. 한국거래소(KRX) 전철홍 부장은 “개장 직후부터 마감까지 숨막히는 공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며 “2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6일간 3조2517억원어치를 팔아치운 외국인의 매도세는 시작부터 거침없었다. 개장 10분 만에 2233억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전날까지 무기력했던 개인들이지만 이날은 달랐다. 외국인이 팔아치운 주식의 두 배(4466억원)를 사들이며 맞대응했다. 외국인이 매물 폭탄을 던지면 개인은 소총과 인해전술로 맞서는 식이었다. 오후 2시50분. 마침내 외국인은 사상 최대(1조3350억원) 물량을 팔아치웠다. 그래도 개인들은 굴하지 않았다. 오후 1시51분. 역시 사상 최대의 물량(1조6043억원)을 사들였다.

 이날 전투의 선봉에는 ‘강남 아줌마’가 섰다. 김재훈 우리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남센터 차장은 “이 지점 고객의 60%가 여성”이라며 “오늘은 고객이 지난주의 5배(금액 기준) 정도 주식 투자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는 “평상시 같으면 특정 주식을 얼마에 사달라는 주문이 대부분이었지만 오늘은 직접 실시간 시세를 확인하며 무조건 주문을 내는 고객들이 많았다”며 “상당수 고객이 휴가까지 미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부부싸움 하는 딸에게 ‘싸움은 나중에 하고 있는 돈 다 끌어서 주식부터 사라’고 조언하는 고객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경희 삼성증권 강남파이낸스센터 지점장은 “최근 주가가 급락하자 강남의 수퍼리치(수십억 자산가)들은 매수 타이밍만 찾고 있었다”며 “이 고객 상당수가 9일 미국 증시 급등을 확인하고 ‘사자’에 나섰다”고 말했다.

 강남의 수퍼리치들은 왜 매수에 나섰을까. 증권가에선 세 가지 이유를 꼽는다. 우선 ‘2008년 금융위기 학습효과’다. 최석원 한화증권 리서치센터장은 “3년 전 금융위기 때 폭락했던 증시가 곧 급등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개인투자자들이 이번 폭락을 투자 기회로 본 것”이라며 “몇몇 고객은 세일 상품을 사듯 주식을 사들였다”고 말했다. 둘째, 시중에 떠도는 700조~800조원의 뭉칫돈이 부동산시장 침체와 저금리로 달리 갈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내 기업의 실적이 탄탄해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는 인식도 한몫했다.

 외국인은 왜 또 그렇게 많이 팔았을까. 증권가에선 “‘ATM 코리아’를 십분 활용한 것”이란 분석이 많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시장 규모가 적당해 받아줄 자금이 풍부하고 개방성도 뛰어난 한국 시장에서 먼저 돈을 뺐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이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증권가의 관측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주식을 판 자금을 모두 바꿔서 나가지 않았다. 그랬다면 원화가치가 훨씬 크게 출렁였을 것”이 라고 말했다.

 이날 전쟁은 개인의 신승(辛勝)으로 끝났다. 결국 외국인은 사상 두 번째인 1조2759억원어치를 팔고, 개인은 사상 최대인 1조5559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치열한 공방전 탓에 이날 주가는 개장 초의 76포인트(4.22%) 급등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4.89포인트 오르는 데 그쳤다.

김창규·허진 기자

◆ATM 코리아=국제금융시장에 충격이 올 때마다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 금융시장에서 현금자동인출기(ATM)처럼 자금을 빼내가는 바람에 유난히 한국이 몸살을 앓는 현상을 표현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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