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폭동, 버밍엄·리버풀 확산 … 런던서 20대 청년 총 맞아 사망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4면

런던 북부 외곽 지역인 토트넘에서 시작한 폭동이 영국 전역으로 번졌다. 8일 오후(현지시간) 런던의 해크니·해로·루이셤·페컴·클래펌 등 10여 개 지역에서 청년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상가 건물에 불을 질렀다. 런던의 동서남북 전역에 걸쳐 있는 이들 지역은 대표적 저소득층 밀집 구역이다. 런던 교외의 크로이던과 영국 중부 지방의 버밍엄·리버풀에서도 집단 약탈이 자행됐다.

 주로 10대 후반과 20대의 청년들이 떼지어 다니며 번화가의 상점에 난입해 상품들을 노략질했다. 휴대전화 대리점, 전자제품 판매점, 운동화와 옷을 파는 스포츠 의류점 등이 집중적으로 공격받았다. 경찰 차량과 경찰관에 대한 폭력행위도 있었지만 관공서를 습격하지는 않았다. 영국 언론들은 실업·빈곤 등으로 사회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무분별한 약탈 행위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희망을 잃은 저소득층 젊은이들이 ‘막가파’식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인 여행객 2명도 8일 오후 도심 하이드파크 인근 퀸스웨이 지하철역 부근에서 강도를 당했다. 이들은 복면을 한 채 떼를 지어 다니는 청년들로부터 휴대전화·태블릿PC 등 200만원 상당의 금품을 강탈당했다. 하지만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 경찰은 8일 크로이던에서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된 26세 청년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고 밝혔다.

영국은 런던 여름올림픽 개최를 1년도 채 남겨놓지 않은 때 도심에서 치안 부재의 상황이 나타나자 초비상이 걸렸다. 올림픽은 내년 7월에 열린다. 영국 정부는 내년 6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9일 휴가를 중단하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비상각료회의를 주재했다. 이번 폭동으로 10일 열릴 예정이였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A매치 친선경기가 취소됐고 칼링컵 1라운드 4개경기도 무기한 연기됐다.

 ◆물품 약탈이 목표=6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폭동에 가담한 청년들은 주로 상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렇다 할 정치적 구호는 등장하지 않았다. 발단은 4일 토트넘에서 발생한 총격 사망사건이었다. 마크 더건(29)이라는 청년이 경찰의 검문에 저항하다 총격을 받고 사망한 것이다. 이틀 뒤 더건의 가족과 친구들이 경찰서로 몰려가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경찰서 앞 시위는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됐으나 그 사이 이 지역 청년들이 상점 유리창을 부수고 들어가 약탈을 시작했다. 약탈 행위를 벌이고 있는 청년들은 대다수가 흑인이지만 백인이나 아시아계(주로 인도·파키스탄계)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보도했다.

 ◆좌절한 청년들=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청년들의 좌절이 집단 난동의 배경에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소득 격차 심화와 실업 증가에 따른 분노가 무차별적 폭력 행위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 정부는 4월에 16~24세의 실업률을 20.3%로 발표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점점 악화되는 추세다. 폭동이 일어난 지역은 학력이 낮은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곳 이다.

 지난해 정권 교체에 성공한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합정부가 펴고 있는 긴축 정책도 불만세력을 키우고 있다는 분석이다. 긴축으로 실업수당 청구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청소년 직업 교육 프로그램 예산도 대폭 삭감됨에 따라 생활이 더 어려워져 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리더십 공백 사태=캐머런 총리는 폭동 발생 4일째인 9일 휴가를 중단하고 귀국했다. 닉 클레그 부총리도 전날에야 집무실에 나타났다. 내무부 장관, 런던 시장, 노동당 당수도 휴가 중이었다. 런던 경찰청장은 공석 상태다. 최근 일요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 불법 도청 사건에 휘말려 사임했기 때문이다. 영국 언론들은 폭동 초기에 정부 지휘 총책임자가 내무부 차관이었을 정도로 리더십 공백 사태가 벌어진 것을 질타하고 있다. 런던 경찰은 8일에야 지방 경찰관들을 파견받아 1만6000명을 폭동지역에 배치하는 등 적극적인 수습에 나섰다. 현재까지 런던에서 525명, 버밍엄에서 138명이 체포됐다.

파리=이상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