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탈영병(백△) 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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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결승 3국>
○·허영호 8단 ●·구리 9단

제4보(33∼39)=전보 마지막 수인 백△는 죄를 묻는다면 ‘전장 이탈’ 즉 ‘탈영’에 해당한다. 위쪽이 발등의 불처럼 급박한데 허영호 8단은 왜 백△ 같은 동떨어진 수를 두었을까.

 사실은 이게 대국심리의 한 단면이다. 수습을 하려면 ‘참고도1’ 백1로 미는 수가 긴요하다. 그 다음 천천히 A로 막아둘 것인지, 빠르게 B로 삭감부터 할 것인지, 약간 엷지만 C로 둘 것인지 그 선택이 어렵다. 뭔가 불길한 흐름 속에서 이렇게 갈등하다 불쑥 백△ 쪽으로 손이 나갔다. 큰 승부에서 가끔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너무 어려운 장면에 봉착하자 뇌가 잠시 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허영호 본인도 국후 “왜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는 평소라면 으레 선수 되는 곳. 지금도 받아만 준다면 이득이 보이는 곳. 그러나 구리 9단은 먹이를 본 매처럼 33으로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백은 손을 뺄 수 없다. 받는다 해도 응수가 궁하다. 그래도 34는 무리수였다. ‘참고도2’ 백1로 막는 게 행마였다. 허영호가 이 정도를 모를까. 그도 잘 안다. 하지만 ‘참고도2’ 백1은 흑2로 끊을 때 응수가 없다. 3까지는 두어야 하는데 그 다음 5를 차마 둘 수 없었다. 33을 당할 때 바둑은 이미 크게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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