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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ㆍ인맥 중시하는 한국인 DNA와 맞아 떨어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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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능률협회가 4월 21일 하얏트호텔에서 연 최고경영자 조찬회. ‘카라얀 리더십’을 주제로 한 강연에 성악가 4명이 함께 출연, 서양 가곡과 국내 가요를 불렀다.


15일 오전 6시40분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 한국능률협회가 주관하는 최고경영자 조찬회장 600여 석은 가득 찼다. 시작 10분 전 이곳저곳에선 참석자들이 서로 악수를 나누며 안면을 트는 장면이 계속됐다. 기자가 앉았던 테이블에서도 첫 대면인 이창술 단석산업 상무, 곽영순 예스코 이사, 박영호 타라 상무, 박상영 광동제약 상무, 정준호 대신증권 이사 등이 익숙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박영호 상무=(명함을 돌리며) 앉아서 받으세요.
▶박상영 상무=회사에만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에서 뒤처지죠.
▶이창술 상무=주신 명함을 보니 제 명함 디자인이 좀 고리타분해 보이네요.

조찬회 직후 오전 9시10분 참석자들이 한꺼번에 호텔을 빠져나가며 호텔 진입로는 검은 세단들이 엉켜 북새통이 됐다.
나흘 후인 19일 오전 7시30분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나라당 기독인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강명순ㆍ구상찬ㆍ이경재 의원 등과 종교계 인사 등 150여 명이 모였다. 강 의원은 “오늘만 해도 세 번째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며 “정치권에서 조찬 행사는 일상”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이 ‘조찬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인간개발연구원, 전경련 국제경영원, 한국생산성본부, 한국능률협회 등의 정례 조찬 모임엔 수백 명씩 몰린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찬 모임인 SERICEO는 1400명의 참석 인원을 수용할 공간을 찾지 못해 매달 말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을 이틀간 빌려 두 차례로 나눠 연다. 조찬 모임이 명문고 동문회 등 사적 네트워크로 확산된 것도 낯설지 않다. 부산중·고의 청조포럼, 경남중·고 덕형포럼, 중동고 백농포럼 등은 월례 동문회를 저명인사나 선배를 초청하는 조찬 강연으로 진행한다. 공군학사장교회의 정례 조찬 모임은 ‘스카이포럼’이다. 강석진 CEO컨설팅그룹 회장은 “해외를 많이 돌아다녀 봤지만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우리처럼 조찬 모임이 활성화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개인 차원의 조찬이나 소규모 비즈니스 조찬 모임도 증가 추세다. 힐튼 호텔 측은 “최근 3년간 조찬 횟수와 매출액 모두 연 10% 안팎의 꾸준한 증가율을 보인다”고 밝혔다. 서울 반포동의 팔레스호텔 윤지숙 홍보 주임은 “요즘엔 회사ㆍ단체만 아니라 주변 아파트 단지의 어머니회 회원 등 여성들이 조식 뷔페로 모임을 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조찬 문화가 확산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그만큼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강신장 세라젬 부회장은 “서양에선 출근 전 시간이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우리는 이런 시간도 ‘과외 공부’ ‘과외 미팅’에 쓰고 있다”고 진단했다. 점심ㆍ저녁 식사로 모자라 아침 시간까지 동원한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조찬 문화가 한국인의 DNA와 맞아떨어지는 측면도 있다고 강조한다. 장만기 인간개발연구원 회장은 “조찬은 정해진 출근 시간 내에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듣고 목표를 달성한다는 점에서 ‘속성반’”이라며 “우리 사회의 ‘빨리빨리’ 문화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강 회장은 “1년에 몇 차례 콘퍼런스를 하는 해외와 비교할 때 매일 어디선가 조찬 모임을 하는 한국의 정보 확산 속도는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했다.

조찬의 또 다른 동력은 한국인의 ‘인맥 문화’다. 지난 14일 인간개발연구회 조찬회에 참석했던 김진국 농협중앙회 부장은 조찬 모임에서 만난 이들의 명함을 따로 보관하는 데 농협 업무상 교류가 필요한 인사가 나올 수 있어서다. 올 들어 무역협회는 참석자 간 교류를 돕기 위해 월례 CEO조찬회에 앞서 미리 참석 인사를 공개하고, 이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신청자를 받는다. 연세대 류석춘(사회학과) 교수는 “조찬 모임은 한국 사회에서 인맥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유지·확대하는 역할을 한다”며 “조선 시대에 있었던 각종 계(契)를 생각해 보면 그 맥락은 동일하다”고 했다. 조찬 문화엔 그늘도 있다. 대규모 조찬 모임은 대체로 참여 자격이 기업체 간부급 이상으로 제한돼 있고, 샐러리맨이 출근 전 자기 시간을 내기도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계층의 벽이 있다는 얘기다.

채병건 기자, 장혜인 인턴기자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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