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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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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61년 12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실무 총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1906~62)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다. 그는 아르헨티나로 도망가 숨어 지내다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체포돼 이송됐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1906~75)가 재판에 참관한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썼다. ‘인간의 탈을 쓴 악마’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그 내용은 충격이었다. 아렌트는 “학살 명령을 아무런 생각 없이 수행한 사고력 결여(缺如)가 반인륜적 범죄의 원인”이라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주장했다.

 끔찍한 범죄는 사이코패스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범죄자로서 타고난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반사회적 충동과 과대망상증이 결합하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범죄자를 ‘권력을 쥔 아이’에 비유했다. 철저히 주관적이고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이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위험한 상황을 상정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이방인 배척’이라는 인종적·종교적·문화적 갈등이 개입하면 광기(狂氣)의 범죄로 발전한다.

 82년 9월 18일 온 세계는 소름 끼치는 뉴스에 전율했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대학살이 자행됐다.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의 묵인 아래 친이스라엘계 기독교 민병대가 난민수용소에 머물던 팔레스타인 부녀자 2000여 명을 몰살시켰다. 유대인은 히틀러의 배타적 인종주의의 희생양이었다. 그런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학살을 방관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광기가 인간의 심성을 돌변시킬 수 있음을 보여줬다. 어느 심리학자의 말처럼 범죄는 겁쟁이가 영웅을 흉내 내려는 ‘열등감 콤플렉스의 표출’에 불과할지 모른다.

 32세 원리주의자가 저지른 노르웨이 대학살에는 범죄적 심리가 한데 버무려져 있다. “가장 위대한 괴물이 될 것”이라는 과대망상, 죄책감 없이 인간 사냥을 하는 사고력 결여, 이슬람에 대한 이방인 배척 심리가 뒤섞여 있다. 이런 희대의 살인마가 “한국과 일본이 문화적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나라”라며 유럽의 롤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니 섬뜩하다. 노르웨이의 비극은 최근 잦아지는 종교 간 갈등과 다문화사회에 대한 반감을 일부 드러내는 우리 사회에도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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