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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이용 0.3초 안에 사고 팔아 “시장 질서 교란” vs “시장 민주화 증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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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22면

‘문화지체(文化遲滯·cultural lag)=급속히 발전하는 물질 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 문화 간에 변동 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

논란 이어지는 미국 증시 고빈도 매매(HFT)

문화지체 현상은 곳곳에서 목격된다. 주식시장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정보기술(IT) 발달로 새로운 매매 행태가 나타나고, 이를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에 대한 규제나 사회적 합의는 항상 몇 걸음 뒤처져 있다.

최근 해외시장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고빈도 매매(HFT·High-Frequency Trading)가 그렇다. 감독 당국은 “시장이 효율적이고 안정적이길 원한다면 ‘치타(HFT 매매업체)’를 가둘 필요가 있다(바트 칠턴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위원)”며 HFT 매매에 대한 규제를 역설한다. 반면 HFT 매매업체들은 “거래 비용을 낮춘 우리야말로 시장 민주화의 증거(캐머런 스미스 퀀트랩 고문)”라며 규제를 반대한다.

HFT 매매는 초단시간에 수차례에 걸쳐 일어나는 대량 거래를 말한다. 사람 손으로는 불가능하다. HTF 매매는 컴퓨터 프로그램(알고리즘)에 의해 이뤄진다. 곧 HFT 매매는 알고리즘 매매의 일종인 셈이다.

HFT 매매를 이용해 수익을 내는 방법은 이렇다. 보통 일반 투자자들이 주식 매수 주문을 내면 시장에 도달하기까지 0.3초가 걸린다. 반면 HFT 매매자들은 0.03초 안에 주문 처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보자. 일반 투자자가 A회사 주식 1만 주 매수 주문을 낸다. HFT 매매자는 0.01~0.03초에 이 주문을 감지한다. 0.05초 안에 HFT 매매자가 A회사 1만 주를 1만원에 매수한다. 0.3초 뒤에 일반 투자자의 주문이 시장에 도착하면 HFT 매매자는 A회사 주식을 1만50원에 매도해 50만원(1만 주x50원)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증권거래세 및 수수료는 감안하지 않음).

차익은 크지 않다. HFT 매매자들은 한 틱(최소 호가 단위)만 먹는다는 생각으로 거래한다. 그렇지만 워낙 거래량이 많아 이익 규모가 막대하다. 2008~2009년 시장 변동성이 커졌던 시절 골드먼삭스는 HFT 매매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골드먼삭스는 전체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의 24%를 주관해 업계 1위를 차지했다. 리서치 회사인 그리니치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2009년 세계 주요 기관투자가들이 거래수수료로 낸 비용은 282억 달러다. 이 중 4분의 1가량이 골드먼삭스의 몫이었던 셈이다. 금융위기 이후 2009년 ‘골든 에이지’를 열었던 골드먼삭스가 1000명을 감축해야 할 정도로 올 2분기 실적이 기대에 크게 못 미쳤던 데는 HFT 매매 규제 강화에 따른 시장 위축도 원인인 것으로 풀이된다.

HFT 매매의 역사는 최소 10년은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2009년 골드먼삭스의 HFT 프로그램 코드 누출 사건이 벌어지면서다. 금융리서치 회사인 태브(Tabb)그룹에 따르면, 현재 미국 2만여 개 주식 중개업체(증권회사) 중 2% 정도가 HFT 매매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지만 HFT 매매가 미국 전체 주식 거래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웃돈다. HFT 매매가 시장의 집중 조명을 받은 건 지난해 5월 미 주식시장에서 있었던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 이후다.

2010년 5월 6일. 그리스 부채 위기의 세계적 확산 우려가 시장에 팽배했다. 이미 다우지수는 500포인트 가까이 밀려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40분쯤 갑자기 시장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5분도 안 돼 500포인트 추가 하락하며 전날보다 1000포인트 급락했다. 순간 폭락으로 1조 달러가 증발했다. 그러다 다시 2분이 지난 2시47분엔 급반등, 결국 이날 다우지수는 348포인트 하락한 채 장을 마쳤다. 일일 변동폭이 사상 최대였다.

‘갑자기(flash)’ 시장이 ‘급락한(crash)’ 이날 사건을 놓고 SEC와 CFTC가 조사에 나섰다. 5개월에 걸친 조사 끝에 HFT 매매가 폭락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 온라인 주식거래 업체가 이날 오후 2시32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E미니S&P500’(S&P500지수 연계선물) 매도 주문을 냈다. 주문이 나오자 HFT 매매 회사들이 41분쯤 일제히 ‘팔자’에 나섰다. 총 20분간 7만5000건(총 41억 달러 가치)의 계약이 쏟아졌다. 하루 거래량의 9%에 달하는 규모다.

감독당국은 HFT 매매에 대한 집중 감시에 나섰다. 일단 ‘서킷브레이커’ 제도를 강화했다. 주가가 5분 동안 10% 이상 변동하면 해당 거래소뿐 아니라 미국 모든 거래소의 거래를 멈추게 했다. ‘네이키드 액세스’ 금지 규정도 도입했다. 미국에서는 중개업체(증권사 등)들이 기관투자가 등 고객에게 매매 시스템을 빌려주면 고객이 거래소에 직접 주문을 낼 수 있다. 이걸 금지하고 모든 주문은 증권사를 통하도록 바꿨다(국내에서는 증권사를 통해서만 거래가 가능하다). 메리 샤피로 SEC 의장은 올 5월 플래시 크래시 1주년 강연회에서 “시장 환경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알고리즘이나 전략 등과 관련해 규제의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증권시장당국(ESMA)도 “10월까지 HFT 매매와 관련한 규제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HFT 매매업체들도 반격에 나섰다.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이들 31개 HFT 매매업체는 최근 ‘PTG(Principal Traders Group)’라는 이익단체를 결성했다. SEC 출신 인사 영입에도 적극적이다. 퀀트랩의 고문인 캐머런 스미스는 전 SEC 시장규제부문 선임고문이었다. 업계 최대인 게트코는 아서 레빗 전 SEC 의장, 리처드 린지 전 SEC 시장규제부문 이사 등을 자문역으로 선임했다. HFT 매매업체들의 로비 자금 지출도 크게 늘었다. 2007년 8만 달러였던 로비 자금은 지난해에는 69만 달러로 불었다. 이들이 정당이나 정치인에 기부한 돈도 2006년 15만 달러에서 지난해 55만 달러로 늘었다.

국내에서는 주식거래에 부과되는 0.3%의 거래세 때문에 HFT 매매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한국거래소 지천삼 팀장은 “시장 안정기에는 HFT 매매가 거래를 활성화시켜 유동성을 공급한다는 순기능이 있지만 시장 불안기에는 가격 급변동을 초래할 수 있다”며 “HFT 매매 활성화에 대비해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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