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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걷기④ 목천읍사무소~용연저수지~이동녕 생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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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천안·아산이 걷기동호회인 유유자적천안(cafe.daum.net/freewalking-cheonan)과 함께 우리지역 걷기 좋은 길을 찾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목천읍사무소를 출발해 정겨운 시골길을 지나 용연저수지를 돌아 오는 호젓한 숲길로 안내합니다. 독립운동의 주역인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에 조성된 기념관에서 선생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정리·사진=조영회 기자

용연저수지 둘레를 걷는 길은 평온하다. 새들의 힘찬 날갯짓은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1. 목천읍사무소~교촌1리 정류장(1.3㎞/20분)

목천읍사무소 앞 길에서 우체국을 지나 인도를 따라 150m 가면 목천초등학교가 나온다. 200m쯤 가면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에 도착한다. 왼쪽으로 100m쯤 가다 오른쪽의 농로로 내려간다. 옥수수 밭을 지나 500m쯤 가면 마을이 있고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개울을 잇는 다리를 지나 교촌1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다.

2. 교촌1리 정류장~목천향교(1㎞/15분)

교촌1리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교촌2리 방향으로 400m 가면 왼쪽으로 해비타트 희망의 마을이 있다. 언덕 위의 하얀 나무집들이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길가의 텃밭에는 고구마, 콩, 호박 등의 농작물이 자라고 있다. 공장과 고추밭을 지나 직진하면 수령이 2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20m쯤 지나면 목천향교 입구에 도착한다.

3. 목천향교~서흥1리 정류장(2.5㎞/50분)

목천향교를 지나 30m 가면 교촌2리 버스정류장이 나오고 다시 70m 가면 용연골 식당에 도착한다. 여기서 맞은편의 용연청소년야영장 안내판을 따라 왼쪽 길로 간다. 대각선 맞은 편의 호박주촌 식당 앞 좁은 길로 들어선다. 50m쯤 가면 물소리가 들리는데 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용연저수지와 만난다. 비포장 길을 100m쯤 가면 용연청소년야영장에 도착한다.

용연청소년야영장 정문 앞의 오른쪽 산길로 내려간다. 30m쯤 가면 너른 평지가 나오는데 오른쪽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소나무 사이로 내려가야 산길로 이어진다. 사람의 왕래가 드문 길이라 나무가 우거져 있고, 잘 닦여 있지 않다. 용연저수지 둘레를 잇는 숲길이다. 길을 들어서면 나무가 우거져 있어 시원하다. 길을 따라 25분 정도 가면 숲길이 끝나고 둑 공사 현장이 나온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저수지를 돌아 나가면 덕전1리 정류장이 나온다. 2차선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서흥2리 정류장을 지나 서흥1리(동막) 정류장이 나온다.

4. 서흥1리 정류장~석오이동녕기념관(2.2㎞/40분)

서흥1리 정류장에서 왼쪽 일월사 방향으로 향한다. 300m 가량 굽이 길을 지나 오른쪽 길로 100m쯤 가면 작은 개울을 건넌다. 100m쯤 가다 갈림길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 서흥교를 건넌다. 왼쪽으로 500m 정도 가면 왼편에 새마을금고연수원이 있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동리1길로 10m쯤 가다 왼쪽 동리2길로 들어선다.

300m쯤 지나면 비닐하우스가 나오고 200m 지나 갈림길서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반사경 맞은편 왼쪽 길로 간다. 작은 다리를 건너 반사경이 있는 쪽으로 100m쯤 가면 석오이동녕기념관에 도착한다. 이동녕선생생가지와 왜가리의 서식을 관찰할 수 있는 관찰망원경이 있다.

5. 석오이동녕기념관~목천읍사무소(2㎞/35분)

석오이동녕기념관에서 나와 왼쪽으로 200m 가면 산골집 식당을 지난다. 다시 300m쯤 가면 큰 나무를 지나고 400m쯤 가면 도로교통안전시설 건물을 지난다. 50m쯤 지나 큰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동리입구 정류장을 지나 200m쯤 가서 목천교를 건너 다시 300m 가면 목천읍사무소에 도착한다.

장병태
유유자적천안 회원

도움말=장병태 유유자적천안 회원


독립운동 주역 석오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의장의 발자취 가득

천안시 목천읍 동리에 위치한 석오 이동녕선생 생가.


석오 이동녕 선생은 1869년 2월 17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서 태어났다. 28세 때 독립협회에 가담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독립협회 주최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가 투옥돼 옥중생활을 했다. 이후 이상재 선생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전개했고 청년회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1906년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해 ‘서전서숙’을 설립,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군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됐다. 한편 생가지 바로 옆에 개관한 기념관에서 이동녕 선생의 친필 휘호와 서신, 임시정부 문서, 초상화 등 시각자료를 통해 선생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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