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대익 ‘다윈의 정원’] ‘태권브이’ 만들려면 ‘사람’부터 공부하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5면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내 꿈은 마징가제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TV만화의 ‘마징가제트’와 ‘태권브이’에 열광했던 그 또래 남자 아이들처럼 로봇 장난감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것을 끙끙대며 조립하는 일을 최고의 지적 도전으로 여겼던 어린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으리라. 급기야 나는 로봇 공학자가 되고자 했고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로봇 공학도들의 일상은 내가 꿈꾸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평생을 모니터 앞에서 그렇게 앉아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섣불리 나는 꿈을 접고야 말았다.

 ‘트랜스포머 3’이 극장가를 점령했다. 서사 구조가 허술하다고 평론가들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리고 그런 지적이 틀리지 않다고 해도 변신 로봇에 대한 시대적 열광과 자동차에 대한 원초적 집착은 근본적으로 변형(트랜스폼)되기 힘들다. 특히 남자들에게 로봇과 자동차의 유기적 결합은 꽃놀이 패나 다름없다. 게다가 현란한 CG에 3D를 입혔으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비록 젊었을 때의 오해와 무지 때문에 로봇과 이별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이 다 메말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거의 모든 영화를 이유 없이 챙겨보지는 않았을 테니까. 사람 수와 개성만큼이나 많고 다양한 인공물들 중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첫사랑은 단연코 로봇이었다.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라디오나 자동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이 첫사랑과 운명적으로 재회했다.

 미국 MIT 미디어랩의 인지로봇 연구실이었다. 똑똑한 어떤 로봇공학자의 기획하에 ‘의미를 이해하는 로봇’을 만들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그것을 위해 전문가 세미나가 한 학기 동안 열렸는데, 놀랍게도 진화학과 과학철학 전문가인 나도 그 현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내에서 로봇 분야의 종사자들은 대개 기계공학, 전자공학, 컴퓨터공학, 그리고 재료공학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실제로 한국산 로봇의 절대 다수는 이 네 부류의 사람들‘만’의 작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같이 상관없어 보이는 분야를 공부한 사람은 국내에서 로봇 연구에 참여할 방법이 없다. 진화학이 로봇 연구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세미나의 일정표를 받아 든 첫날부터 로봇 전문가에 대한 내 통념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세미나가 계속되면서 나는 로봇에 대한 첫사랑을 다시 떳떳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기계·전자·컴퓨터·재료를 전공한 공학자보다 오히려 철학자·생물학자·심리학자, 그리고 언어학자들이 세미나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들겠다는 그들은 정말로 인간의 인지·감정, 그리고 언어를 함께 탐구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든다고 하니 그런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에게는 그동안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로봇 연구 및 산업 전문가 네트워크에 인간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공학도들에게 철학·심리학·언어학을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국내 로봇공학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휴머노이드 로봇 제작을 위해 그런 분야들이 꼭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할까? 그들도 그런 분야에 노출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요즘 융합과 통섭이 시대정신으로까지 진화하는 듯하다. 당분간 이것을 능가할 변화의 메가트렌드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왔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이 중요한 지적 도전과 흐름이 한때의 유행과 구호로 끝나 버리지 않을까 해서다. 국내의 로봇 관련 연구와 산업이 세계 4위 수준이라는 말도 있다. 로봇 산업이 ‘차세대 신성장 동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 토를 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국내의 로봇 관련자들이 자신의 영역만 고수하거나 공학 분야의 내부 거래에만 만족한다면 한국산 로봇은 ‘재롱 기계’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며 로봇 선진국과의 격차도 더 커질 것이다.

 이제 공학도들에게도 인간을 탐구하는 여러 분야들도 가르치자. 생물학·심리학·언어학·철학을 맛보게 하자. 스티브 잡스처럼 기계에 인문을 입힐 수 있는 공학자를 꿈꿔 보자. 그리고 로봇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고 그런 사회가 인류에게 어떤 도전과 기회를 줄지도 함께 고민해 보자. 아주 먼 얘기라며 느긋해하는 사람들의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로봇 분야는 한국에서 지식 융합이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