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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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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중국 남송 때 한세충(韓世忠)은 8000명의 병사로 금나라의 10만 병력을 물리친 명장이다. 전투 당시 그의 아내 양홍옥(梁紅玉)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는 일을 도왔다. 손수 만두를 빚어 병사들에게 나눠 먹이기도 했다. 그런데 병사 수에 비해 만두 양이 턱없이 적었던 모양이다. 그때 한 말이 “만두의 양이 많지 않으니까 마음(心)에 점(點)이나 찍으시오”다. 오늘날 ‘낮에 먹는 끼니’를 뜻하는 점심(點心)이란 말의 유래다.

 점심의 본래 의미는 마음에 점을 찍듯 소식(小食), 즉 적게 먹는 음식이다. 식사 전이나 중간에 조금 먹는 중화요리 딤섬이 바로 그 ‘점심(뎬신·点心)’이다. 불교 선종(禪宗)에서도 배고플 때 조금 먹는 음식을 점심이라고 했다. 침잠된 마음을 먹을 것으로 점화(點化)해 활기를 회복한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점심이 오늘날 점심의 의미로 굳어진 건 18세기 후반 들어서다. 그 전까진 식사시간과 무관한 소식(小食)의 의미였다. 조선시대 초·중반 기록엔 조점심(朝點心), 오점심(午點心), 주점심(晝點心), 석점심(夕點心), 모점심(暮點心) 등의 용어가 보인다. 조금씩 먹는 점심이 하루에도 여러 번 있었다는 얘기다. 간식 또는 새참 정도였을 터다. 이 가운데 ‘주점심’이 낮에 다소 형식을 갖춰 먹는 ‘낮밥(晝飯)’과 엮이면서 지금의 점심과 같은 의미로 자리 잡았다. 점심이 식사량이 아니라 식사시간을 기준으로 한 용어로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근세 이전까진 식사의 기본은 아침과 저녁 두 끼였다. 예부터 식사를 달리 ‘조석(朝夕)’이라고 불렀을까. 정조 때 학자 이덕무의 『앙엽기』는 ‘조석 2식으로 한 끼 5홉씩 하루 한 되를 먹는다’고 전한다. 계절에 따라 끼니 수가 달라지기도 했다. 19세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엔 2월부터 8월까진 세 끼, 9월부터 1월까진 두 끼를 먹는다고 나온다. 낮이 짧아 활동량이 적은 시기엔 점심을 안 먹었다는 거다. 성균관에서도 음력 2월 봄 석전제를 지낸 뒤부터 음력 8월 석전제까지만 점심을 먹었다.

 점심값 1만원 시대가 되면서 직장인들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대학·관공서 구내식당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외부 넥타이부대로 넘쳐난다. 편의점 삼각김밥과 도시락 매출이 급증하는 추세다. 더치페이도 이젠 낯설지 않은 풍속도다. 이러다가 ‘먹은 셈 치고 건너뛰는’ 옛 점심(點心)으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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