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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 패러다임, 임대로 중심이동 … 정부는 ‘매매 활성화’ 에만 초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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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주택시장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기존에 상식으로 통하던 ‘공식’은 이미 시장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집값 상승 신화가 대표적이다. 매매 값과 전셋값의 동조현상도 사라졌다. 전세 대신 월세가 임대시장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재건축·재개발 시장도 예전만 못하다. 투자자들은 임대상품에 꽂혔다. 이런 공식 파괴는 특히 서울 등 수도권에서 두드러진다. 시기적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3년째 집값이 장기 침체되면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2000년대 초중반과 달리 집값이 많이 오르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주택시장이 구조변화를 겪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따라 달라진 주택시장에 대응해 부동산 대책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최현철·박일한·황정일 기자

주택시장 앞날이 불확실하다. 수도권에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 나타나고 지방은 과열을 걱정할 정도로 달아오르고 있다. 부산 광안대교에서 바라본 해운대 아파트들이 안개에 싸여 있다. [중앙포토]<사진크게보기>


수도권 전셋값 24% 상승 속
2년 동안 집값 상승률 0%

#전셋값은 뛰는데 매매 값은 제자리걸음

 경기도 수원시 영통동 소형 아파트에서 1억원에 전세를 살던 김모(38)씨는 최근 전셋값을 5000만원이나 올려주고 계약을 연장했다. 4000만원만 더 보태면 같은 아파트 급매물을 살 수 있지만 김씨는 큰 관심이 없다. 집값이 오를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영통동 일대 아파트 가운데 매매 값 대비 전셋값 비율(전세비율)이 70%가 넘는 단지가 적지 않다. 전셋값은 계속 오르고 있지만 30%만 더 얹어 아예 구입하려는 수요는 별로 없다. 영통써브공인 한민숙 사장은 “수요자들이 전셋값 오름세가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집값이 얼마나 오르겠느냐며 전셋집만 찾는다”고 말했다.

 2~3년 전까지 부동산 시장의 공식은 “전셋값이 뛰면 집값이 따라 오른다”는 것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기가 회복되면서 전셋값이 먼저 오르자 곧바로 매매 값이 뒤따랐다. 오른 전세금에 조금만 보태 아예 집을 사자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로 주택 공급이 줄자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도 작용했다. 이후에도 전셋값과 매매 값은 서로 밀고 당기며 같이 움직였다. 특히 집값 상승기엔 이런 추세가 더 뚜렷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수도권 전셋값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2009년 3월 이후 지난달 말까지 전셋값은 24.7% 상승했다. 반면 집값 상승률은 0%로 제자리걸음이다. 한양사이버대 부동산학과 지규현 교수는 “집을 사고팔아 큰돈을 벌기가 어려워지자 요즘 세입자들은 전세로 살면서 여윳돈으로 다른 데 투자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주인은 고정적 임대수입
세입자는 전셋값 부담 덜어

#셋집 두 채 중 한 채가 월세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줄면서 임대차 시장도 월세 중심으로 바꾸고 있다. 집값이 많이 오를 땐 전세를 끼고 모자라는 금액만 대출을 받아 집을 산 뒤 팔아 시세차익을 챙겼다. 그러나 집값이 정체되면서 이런 투자수요가 줄었다.

집주인들도 전세금을 받아 다른 데 투자하는 것보다 월세로 돌려 임대수입을 얻는 게 더 유리해졌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드림공인 진미숙 공인중개사는 “2~3년 전만 해도 전세가 80% 이상이었지만 요즘은 10채 중 5~6채가 월세”라고 말했다.

 세입자 중에서도 턱없이 오른 전세금을 감당할 수 없어 먼저 월세를 원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중간 소득계층이 수도권에서 평균 금액의 아파트 전셋값을 마련하는 데 4.6년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임대차 시장에서 전세 비중이 크게 줄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중개업소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지난해 1년간 임대차계약 중 전세가 7.5%포인트 줄어든 반면 월세는 그만큼 늘었다.

 순수 월세보다 전세와 월세의 중간 단계인 보증부 월세도 크게 늘고 있다. 대치동 토마토공인 김성일 사장은 “기존 전셋값을 돌려주려면 목돈이 필요한 집주인들이 전셋값 상승분만 월세로 바꾸면서 보증부 월세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지난해 42.8%였던 월세비율이 2020년이면 63.3%로 급등할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지난해 57.2%를 차지했던 전세 비중은 2020년엔 36.7%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투자비용 아파트보다 적어
청약률 나홀로 고공행진

#오피스텔·상가 전성시대

 아파트 시장에서 빠져나온 투자자들이 임대수익형 상품으로 몰리고 있다. 지난 6월 서울에서 보금자리주택을 제외하고 분양한 사업장은 모두 다섯 곳이다. 대형 건설사의 유명 브랜드 아파트도 세 곳이나 됐지만 청약순위 내에 모집가구 수를 채운 곳은 한 곳도 없었다.

 하지만 오피스텔과 도시형생활주택은 높은 청약경쟁률을 기록했다. 같은 달 대우건설이 송파구 문정동에 공급한 송파 푸르지오시티(1009실)는 8000여 명이 몰려 평균 8.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앞서 서울 성동구 서울숲더샵과 서초구 강남역 2차 아이파크 오피스텔도 모두 50대 1이 넘는 경쟁률을 나타냈다.

 또 5월 분양한 도시형생활주택 신원아침도시 마인(89가구)의 경쟁률도 10.5대 1이었다.

 나비에셋 곽창석 사장은 “1~2인 소규모 가구의 급증 등으로 소형 주택 수요가 크게 늘면서 틈새시장으로 오피스텔과 도시형생활주택이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도 인기다. 올 들어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입찰방식으로 분양한 단지 내 상가는 대부분 예정가격의 1.5배 수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지난달 수원시 호매실지구 단지 내 상가 분양에선 입찰경쟁률이 평균 13대 1이었고 낙찰가율(예정가 대비 낙찰가 비율)이 300%를 넘긴 점포도 있었다. 국민은행 박합수 부동산팀장은 “오피스텔과 도시형생활주택, 단지 내 상가는 아파트에 비해 투자비용이 적게 들어 투자 부담이 작다”고 말했다.

투자비용 아파트보다 적어
청약률 나홀로 고공행진

#약발 안 듣는 재건축·재개발 규제 완화

 과거 주택시장은 재건축·재개발 등 도심 재생사업이 주도했다. 집 지을 땅이 별로 없는 도심에서는 재생사업이 중요한 주택 공급원이었기 때문이다. 집값이 오르면 재건축·재개발의 개발이익도 커지므로 투자 수요가 몰리고 이게 다시 집값을 더 끌어올리는 구조였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바뀌었다. MB정부 들어 재건축·재개발 활성화를 위해 각종 규제를 대폭 풀었지만 관련 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올 들어 지난달 말까지 서울 아파트 값은 평균 0.1% 올랐는데 재건축 아파트는 1.8% 내렸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1단지 50㎡형(이하 공급면적) 급매물은 8억7000만원 선으로 지난 3월(9억2000만원 선)보다 5000만원 정도 내렸다. 강동구 고덕지구에서도 지난 4월 사업시행인가가 난 고덕시영은 인가 이후 주택형에 따라 2000만~3000만원 내렸다.

 강북지역의 재개발 시장도 거래가 크게 줄며 찬바람만 분다.

 재건축·재개발 시장이 얼어붙은 것은 주변 일반 아파트 시장이 침체돼 있기 때문이다. J&K부동산투자연구소 권순형 소장은 “재건축·재개발 시장은 기본적으로 집값이 올라야 개발 기대감으로 활기를 띠는데 집값이 오를 것 같지 않으니 투자자들이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주택시장이 전체적으로 가라앉으면서 도심 재생사업이 잘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정책도 달라져야…

임대 늘면 주거비 상승
다양한 보조 정책 마련해야

#추세 당분간 지속, 정책 조정 필요

 전문가들은 대체로 “앞으로도 집값이 크게 오르기는 어렵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주택 수요는 줄어들고 공급량은 늘기 때문이다. 정부의 주택공급계획대로라면 2010년 말 99%인 수도권 주택보급률은 2018년 103.3%로 올라가게 된다. 일시적으로 상승할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물가상승률이나 금리 수준을 넘지는 않을 전망이다. 2000년 이후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 9월까지 수도권 아파트 값이 연평균 10.9%씩 올랐던 모습이 재현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정부의 정책 방향은 ‘매매 활성화’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여러 차례 나온 대책이 모두 이 같은 기조하에 만들어졌다. 전셋값 폭등도 매매만 활성화되면 해결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 없이는 매매시장을 살리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 방향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이유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재룡 수석연구원은 “중장기적으로 주택 공급을 꾸준히 늘려 전·월세 시장이 안정을 찾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대차 시장이 월세 중심이 되면 주거비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정부는 다양한 주거비 보조 정책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렇다고 단기효과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건국대 부동산학과 심교언 교수는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보려고 시장 가격에 손을 대는 것은 시장을 왜곡시킨다”며 “그런 면에서 국회에서 거론되고 있는 전·월세 상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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