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실수 덮어주려 ‘손 씻는 물’ 마신 여왕 폐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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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전은 나라의 품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국가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나온 의전 업무의 중요성 중 한 대목이다. 의전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행사의 흐름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국가 간에 지켜야 할 규범·형식이 의전이라면 기업·개인 간엔 매너와 에티켓이다. 이 문장에서 의전을 매너로, 나라·국가를 기업으로 바꿔 보자. ‘기업은 좋은 비즈니스 매너를 통해 원하는 사업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이라면 그에 걸맞은 하드웨어(상품)는 기본이다. 여기에 더해져야 할 게 소프트웨어(비즈니스 매너)다. 어떤 소프트웨어로 하드웨어의 가치를 극대화할 것인가.
글로벌 시장의 성패는 여기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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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백화점은 지난 5월 직원들에게 소책자를 배포했다. ‘글로벌 비즈니스 에티켓’이라는 제목의 책 속엔 중국·러시아·베트남·인도네시아에서 비즈니스 할 때 유용한 팁이 국가별로 담겨 있다. 이들 4개 국가는 롯데백화점이 진출한 곳이다. 미팅할 때 적절한 복장, 식사 초대 때 응대 방식, 대화법 등을 구체적으로 담았고 현지 주재원의 경험도 실었다. 주재원들은 “국가마다 문화 차이가 있어 실수하거나 곤란한 경우가 있었다”고 전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러시아에서는 선물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기 때문에 선물을 거절해도 계속해서 권해야 한다. 다만 죽음을 상징하는 노란색 꽃과 짝수의 꽃다발은 피한다’ ‘베트남에서는 신중해 보이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일부러 어느 정도 침묵을 유지하는 게 좋다. 대화 흐름이 끊기는 것이 불편하다고 계속 이야기를 하면 상대방은 오히려 싫어할 수 있다.’책을 만든 해외사업기획팀 박가혜 대리는 “독특한 관습을 모른다고 협상 결렬로 이어지는 일은 없지만 문화에 어긋나는 행동은 상대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좌빵우물’만으로는 매너 지키기 어려워
우리 기업인들도 서구식 규범을 바탕으로 한 일반적인 글로벌 비즈니스 매너를 잘 알고 있다. 해외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이 늘면서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다. 기업에선 해외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매너 교육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됐다. 따라서 ‘초면에 나이나 결혼 여부를 묻지 말라’거나 ‘좌빵우물(빵은 왼쪽, 물잔은 오른쪽에 있는 것이 내 것)’은 상식에 가깝다.하지만 지역·문화권별로 독특한 관습·관행을 살피다 보면 생소한 것이 여전히 많다. 각국의 종교상 금기나 역사적 상징과 같은 것은 잘 몰랐다가는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지켰을 땐 상대에게 큰 감동을 줄 수 있고, 지키지 않았을 땐 불쾌한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컨대 ‘OK’나 ‘돈’을 뜻하는 사인(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으고 나머지 손가락을 편 것)은 브라질에서는 욕으로 통용된다. 인도인 사업 파트너에게 축의금을 낼 일이 있다면 흰색 봉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흰색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거래와 협상 방식도 조금씩 다르다. 브라질에선 목소리가 크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베트남에선 서열을 지키지 않고 회의실에 입장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으로 받아들여진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고자 하는 한국식 협상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중국인과 오래 거래해 온 한 기업인은 “참고, 참고 또 참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타고난 장사꾼인 중국인들은 꼼꼼하고 철두철미하게 따지는 경향이 있다”며 “이런 일로 짜증 내거나 언짢은 티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인도 바이어들은 때로 터무니없이 가격을 후려치기도 하는데, 화를 낼 필요는 전혀 없다. KOTRA 인도 담당 박민준 과장은 “인도인들은 상대방이 지칠 때까지 논리적으로 협상을 진행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내는 데 익숙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인도인들이 흔히 구사하는 전략을 소개했다. 계약서에 삽입될 사항 전부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고 하나씩 양보하는 방식이다. 인도인의 양보에 마음이 약해진 한국 기업이 몇 가지를 양보하다 보면 결국 불리한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마저도 상대 국가의 까다로운 비즈니스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조언이다.

국가 의전을 담당하는 외교통상부 이태로 의전기획관은 “상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매너”라고 말했다. 결국 매너의 본질은 상대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얼마나 배려하느냐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문화를 알려주는 것도 꼭 갖춰야할 매너다. 상호 존중이라는 기본원칙을 감안하면 당연한 얘기다. 이 기획관은 “한식 접대가 외국인과의 비즈니스와 사교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식사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식욕을 함께 나눈다는 측면에서 참석자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감대를 갖기 쉽기 때문이다.

지역·시대 따라 변하는 매너…핵심은 존중
비즈니스 매너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대부분의 기업은 해외 진출에 앞서 상대방에 대해 철저하게 사전 조사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자주 실수하거나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 있다. 첫째는 식사에서 좌석 배치의 중요성이다. 참석자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수집해 배치하지 않으면 구설에 오를 위험이 있다. 참석자 각자가 왜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 합리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슬람 국가를 제외하고는 남녀를 섞어서 배치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외국인끼리 나란히 앉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성을 끝에 앉히는 것도 매너가 아니다.

때로는 음주도 비즈니스의 연장선이다. 중국에서 오래 사업을 한 A씨는 “중국인과의 술자리에서는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못 마신다 하고 시작을 하지 않으면 50점이지만, 마신다 해놓고 중간에 빼는 건 0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술을 건네받으면 거절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반대로 음주를 즐기지 않는 외국인도 많으므로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슬람 국가에선 와인으로 오해할 수 있는 사과·포도주스로 건배하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가 있어 오렌지주스로 대체하는 게 좋다.

‘의전은 잘해야 본전이고, 작은 실수도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매너의 기본 가치는 동서양 공통으로 상호 존중과 배려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복잡한 문제도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홍주희 기자, 장혜인 인턴기자(서강대 정치외교학과)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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