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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속 5관왕 하이든, 하루 걸러 금 하나씩 추가한 수퍼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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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호 20면

1980년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5관왕을 달성한 에릭 하이든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왔다. 하이든은 은퇴 후 스탠퍼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AP=본사특약]

1980년 2월 25일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 센터. 스피드 스케이팅 1만m 경기가 끝나자마자 관중이 일제히 “에릭”을 외쳤다. 스물두 살의 청년이 겨울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은 에릭 하이든.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겨울 스포츠맨이다.

겨울올림픽이 낳은 영웅들

하이든은 한국 팬들에게도 낯익은 이름이다. 76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주니어 빙상선수권대회 때문이다. 그 대회 우승자는 한국의 이영하였다. 이영하보다 두 살 어린 하이든은 종합 2위에 올랐다. 하이든은 이후 77년부터 79년까지 스프린트 대회와 세계선수권에서 각각 3연패를 차지하며 세계 정상의 선수로 발돋움했다. 반면 이영하는 성인 무대에서는 주니어 시절만큼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에서 하이든은 절정이었다. 개회식에서 선수단을 대표해 선서를 한 하이든은 500m·1000m·150 0m·5000m·1만m의 전 종목 석권을 목표로 세웠다. 과욕처럼 보였다. 하이든이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거의 하루 걸러 경기가 열리는 올림픽 특성상 체력의 한계에 부딪힐 거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영화 ‘쿨러닝’의 한 장면. [중앙포토]

가장 큰 고비는 첫날 열린 500m였다. 이 종목에는 세계기록 보유자이자 4년 전 인스부르크에서 금메달을 딴 예브게니 쿨리코프(당시 소련)라는 라이벌이 있었다. 그러나 하이든은 같은 조에서 경쟁한 쿨리코프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5000m에서도 하이든을 따라올 선수는 없었다. 남은 경기는 쉬웠다. 하이든은 20일과 22일, 주종목인 1000m와 1500m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마지막 1만m에서도 쉽게 금메달을 따냈다.

하이든이 뛰어난 스케이터가 될 수 있었던 건 타고난 재능에 노력을 더했기 때문이다. 하이든은 비시즌인 여름 내내 모래와 납이 든 90㎏짜리 튜브를 허리에 감고 매일 200회 이상 무릎 굽혀 펴기를 했다. 20㎞ 달리기와 160㎞ 사이클링도 빼놓지 않았다. 정형외과 의사였던 하이든의 아버지는 자신이 고안한 호흡법과 근육단련법으로 아들을 지도했다. 하이든은 이렇게 만들어진 체력을 바탕으로 다른 종목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했으며 86년에는 최고의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했다. 은퇴 뒤에는 아버지를 따라 스탠퍼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미국프로농구 새크라멘토 킹스와 미국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 팀닥터로도 활동했다.

‘피겨 여제’ 카타리나 비트는 현역 시절 플레이보이지 표지모델로 등장하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비트, 미국 토머스와 ‘카르멘 전쟁’
2018년 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위한 IOC 총회는 두 피겨 여제의 장외 대결로 관심을 모았다. 평창 홍보대사인 김연아와 뮌헨 유치위원장인 카타리나 비트가 주인공이었다. 평창이 개최지로 결정되긴 했지만 비트는 마지막까지 열정적인 활동으로 뮌헨 팀을 이끌었다.

동독 출신의 비트는 5살 때부터 스케이트를 신었다. 재능을 인정받은 비트는 공산권 국가 특유의 엘리트 교육을 거쳤다. 그는 69년과 70년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자이페르트의 어머니이자 코치인 유타 뮐러를 만나면서 기량이 급상승했다. 비트는 17살이던 82년, 세계선수권 준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84년 인스부르크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85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비트는 86년 드디어 최고의 경쟁자를 만났다. 미국 출신의 데비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흑인 특유의 탄력을 앞세운 파워 넘치는 점프로 비트의 세계선수권 3연패를 저지했다. 두 사람은 공산 진영과 자유 진영 출신, 미모가 돋보이는 백인과 학구파 흑인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돼 더욱 관심을 모았다.

비트와 토머스의 경쟁이 정점에 달한 때는 88년 캘거리 올림픽이었다. 경기 전부터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 둘의 대결은 ‘카르멘 전쟁’이라고 불렸다. 두 사람 모두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비제의 ‘카르멘’을 골랐기 때문이었다. 비트는 이 대결에서 승리하며 올림픽 2연패를 이뤘다. 피겨 여자 싱글 역사에서 올림픽 연속 우승을 달성한 사람은 1928년부터 1936년까지 3연패를 이룬 소냐 헤니(노르웨이)와 비트뿐이다.

맨땅에 헤딩 그린 영화 ‘쿨러닝’
미국은 80년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에서 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하이든이 5개를 땄고, 나머지 하나는 아이스하키에서 나왔다. 사실 미국 아이스하키 팀의 금메달은 하이든의 5관왕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미국은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임에도 아이스하키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무적의 쇄빙선’이라 불리며 올림픽 5연패에 도전하는 막강한 팀이었다. 반면 미국은 프로 선수 없이 대학생 위주로 팀을 꾸렸다. 냉전인 한창이던 시절이지만 소련과의 대결에 신경을 쓰는 미국 국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감독을 맡은 허브 브룩스의 생각은 달랐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60년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제패의 주역이었던 브룩스는 훈련을 통해 선수들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브룩스는 선수들에게 “너희의 재능은 부족하다”고 질타하면서도 “포기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1년 동안 63번이나 치른 연습경기를 통해 선수들을 조련한 브룩스는 마침내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2004년 개봉한 영화 ‘미라클’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브룩스는 아직도 미국을 대표하는 지도자상으로 꼽힌다. 브룩스는 200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80년 올림픽 당시 수비수로 활약했던 켄 모로는 “위대한 혁명가들은 모두 일찍 죽는 것 같다. 그는 스포츠계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가였다”고 회상했다.

쿨러닝(1993) 역시 겨울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영화다. ‘눈 한번 본 적 없는 열대의 자메이카에서 오합지졸들이 모여 봅슬레이 팀을 만든다’는 스토리는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88년 캘거리 올림픽에 출전했던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의 얘기다.

한국에서도 겨울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2009년 개봉한 ‘국가대표’다. 국가대표는 올림픽 스키점프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800만 관객을 불러들이는 빅 히트를 했다. 국가대표의 흥행은 비인기 종목인 스키점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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